광개토왕
한자 : 廣開土王, 이명 : 永樂大王, 好太王, 談德, 安, 시호 :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 國崗上廣開土地好太聖王
- 저필자연민수(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생몰년생년 : 374년 (음) ~ 몰년 : 413년 (음)
- 발행일2011년 3월 25일
- 분류왕
광개토왕과의 대화
건국신화를 창출한 광개토왕
내년이면 광개토왕이 승천한 지 1600주기이다. 약관 18세에 즉위하여 21년간의 재위 동안 동북아의 주역으로서 한 시대를 호령했던 대왕의 위업은 고구려의 왕도였던 국내성, 현재의 집안시 압록강변에 위치한 광개토왕비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세월의 거센 풍상을 이겨내면서 당시의 모습대로 한치의 흔들림이 없는 거석의 위용은 경외롭기만 하다. 역사의 현장에 선 지금 대왕의 일대기를 담은 훈적비는 시대의 증언자가 되어 시공을 초월하여 수많은 진실을 전해주고 있다.
‘시조 추모왕’으로 시작되는 비문은 고구려의 건국을 알린다.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남하하여 엄리대수에 이르자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이 어머니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잇고 거북의 무리를 짓게 하라”고 외치자 도하의 길이 만들어져 비류곡 홀본산성 위에 도읍을 정할 수 있었다. 혼강이 흐르는 가파른 절벽 위에 세워진 오녀산성의 모습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이후 건국을 완성한 추모왕은 황룡을 타고 승천한다. 2대 유유왕 때 국내성으로 천도하여 대주유왕을 거쳐 그 17세손인 광개토왕은 무위가 사방에 떨치고 풍요와 안녕의 시대를 여니, 대왕을 추모하고 훈적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비를 세운다(立碑銘記勳績以示後世)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천하질서와 민족적 공동체의 확립
흔히 광개토왕을 정복군주라고 한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崗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시호는 대왕의 생전 업적이 영역확대라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북과 동으로 거란, 숙신, 동부여를 정벌하고, 남으로는 백제, 신라, 임나가라∙안라 등 가야제국으로 세력을 뻗쳤다. 이중에서 대왕의 초미의 관심사는 백제였다. 양국은 부여족이라는 같은 줄기에서 나왔지만, 건국과정과 성장발전단계에서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역사적∙지리적 요인이 있었다. 4세기초 고구려는 남방진출의 장애물이었던 낙랑군을 치고 그 남쪽의 대방군이 허물어지자 백제와 공방전을 벌인다. 그러나 4세기 후반 백제의 불세출의 군주 근초고왕은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광개토왕의 조부인 고국원왕을 피살시켰다. 이때 세살배기였던 광개토왕은 소년기를 거치면서 선대의 숙원이었던 백제에 대한 복수의 일념을 불태운다. 즉위 후 총사령관이 되어 5만의 대군을 이끌고 수륙양면작전으로 일거에 백제의 왕성을 함락시킨다. 근초고왕의 손자인 백제 아신왕은 광개토왕의 면전에 무릎을 꿇고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고 맹서한다. 그러자 백제왕실을 붕괴시키는 일 없이 조공체제의 확립과 복속의 서약을 받고 철군한다.
광개토왕의 군사행동은 한반도남부가 단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민족적 동질체를 확인하기 위한 고구려중심의 통일적 공동체의 선언이었다. 고구려의 발상지는 만주일대이지만, 주요 관심사는 남방에 있었다. 그토록 격렬했던 북방의 선비족이 세운 후연과의 싸움이 비문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의도적 누락이고 한반도야말로 대왕이 구현하고자 했던 천하질서의 핵이었다. 건국신화를 다루고 국제전을 치룬 비문의 1면이 남방을 향해 배치된 것은 바로 한반도를 아우르는 민족적 동질체를 추구하고자 한 대왕의 진심이 반영된 것이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왜가 백제∙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광개토왕비문의 최대의 논쟁점이자 고대일본의 한반도 지배설의 증거로서 근대일본사학 이후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문의 진실은 ‘고구려의 속민인 백제∙신라를 왜의 신민으로 했다’는 명분론에 기초하여, 고구려의 천하질서에 들어온 왜를 격퇴하여 한반도남부를 구원한다는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광개토왕의 정복군주적 이미지를 초월한 도덕적 군주상을 정립하려는 논리로서 비문에서는 침략자로서의 강한 왜의 이미지를 창출하여 비역사적 사실을 삽입하였다. 이것은 전쟁의 수행과정에서의 백제 등과 연계한 왜병의 모습으로부터 착안한 광개토왕의 영토관, 천하의식을 말해준다.
부왕의 유업을 계승하여 호국의 신이 된 장수왕
광개토왕비의 가까운 곳에 대왕의 영혼이 깃들고 있는 태왕릉이 위치해 있다. 상당부분 허물어져 있지만, 기단부의 거석의 크기와 배열로 보아 고구려 최대의 왕릉이다. 압록강을 바라보며 국내성의 국강상에 위치한 2개의 거대 석조물은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고구려 전성기의 제국적 성격을 대변하고 있다. 이 구릉의 주위에는 비문에 보이는 광개토왕의 능묘를 지키는 수묘인(守墓人) 330가(家)를 배치시키고, 이들을 함부로 매매해서는 안된다는 법령을 포고하였다. 산악과 같이 견고한(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관리체제를 구축하여 왕릉의 훼손을 막고자 했던 왕의 의지가 느껴진다.
광개토왕의 유업은 장수왕에 의해 계승된다. 부왕의 유훈인 남방에 대한 천하질서의 확립을 위해 지휘본부가 설치된 평양으로 천도한다. 산악지대로 둘러싸인 협소한 국내성을 떠나 새로운 국가건설의 이념을 추구하기 위한 국가대사였다. 한반도남부의 양대세력인 백제와 신라에 대한 복속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한강유역을 손아귀에 넣고 신라왕경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신라왕을 고구려의 천하질서 속에 편입시켰다.
광개토왕의 유업을 완성한 장수왕은 국내성에 마지막 안식처를 만들었다. 국내성의 최후의 군주로서 새로운 국가건설의 청사진을 마련한 장수왕의 위업은 부왕의 유훈과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국내성은 선왕들이 잠들어 있고, 그가 출생∙성장하여 15년간 통치한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고향이자 성지였다. 부왕의 묘소와 국내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북쪽 구릉의 상단에 생전에 조영한 장군총이라 불리우는 거대 석조건축물에 영면하게 된다. 호국의 신이 되어 북방의 외적으로부터 국내성을 보호하려는 의지의 표상이다. 광개토왕∙장수왕 2대 100년은 고구려사에 있어서 새로운 국가건설의 목표로서 국력의 확장과 민족적 공동체의 확립을 위해 전력을 다했던 민족사의 중흥기였다.
북녘땅이 보이는 남방을 향해 세워진 광개토왕비
광개토왕비와 태왕릉이 있는 국강상 언덕
국내성 북쪽 구릉에 위치한 장수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