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
한자 : 則天武后, 이명 : 武則天, 武照, 武媚娘,
- 저필자우성민(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생몰년생년 : 624년 1월 23일(음) ~ 몰년 : 705년 11월 2일(음)
- 발행일2010년 9월 25일
- 분류왕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성황제, 측천무후
중국 산시성 시안(西安)에서 서쪽으로 85㎞ 떨어진 곳에 위치한 건릉에는 당나라 여제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가 잠들어 있다. 건릉은 당 고종과의 합장묘이며 중국 내에서 진시황릉과 함께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고 완벽하게 보존된 황제능으로 꼽힌다. 후세의 기록들과 사가들의 평가(조문윤 등의 ‘무측천평전’을 참조함)를 근거로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생애와 업적, 그 삶에 얽힌 일화, 우리역사와의 관계, 시비 공과 등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녀는 고대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시대인 당이 건국된 지 30년이 지난 시기인 624년 서족 출신이긴 하지만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된 무사확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당나라 사람 최융에 의하면 “그녀는 뛰어난 외모에 이마에 부귀한 상”을 가졌다고 하였는데, 대단히 아름다운 용모 덕분에 열네살 되던 해에 당 태종의 후궁이 된다.
측천무후는 자연스럽게 당태종의 통치술을 배우면서 엄격한 궁정교육도 받고 문화적 소양도 익혔다. 태종의 건강이 갈수록 나빠지자 태종을 문안하러 오던 황태자 이치(고종)도 측천무후의 아름다움에 매료당한다. 자신보다 4살 많은 명목상은 모자관계인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고, 점차 서로 애정이 싹트게 되었다.
당의 황금기를 이끈 여제… 잔인무도했다는 평도
태종이 죽은 뒤, 당시 풍습에 따라 무측천도 다른 비빈들과 함께 감업사에 가서 비구니가 되었다. 고종은 자주 감업사로 가서 무측천을 만났다. 무측천의 신분으로는 다시 황궁으로 가긴 매우 어려웠지만 고종의 황후(왕황후)와 또 다른 후궁 소숙비 사이에 질투가 극에 달하면서, 황후가 측천무후를 황궁으로 데려와 소숙비에 대한 고종의 총애를 빼앗고자 했다. 이 때 측천무후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그녀가 두 번째 입궁한 뒤 고종의 총애는 측천무후에게 향했고, 653년 딸을 낳았다. 어느 날 황후가 어린 공주를 보기 위해 측천무후의 처소에 왔다 돌아간 후 측천무후는 딸을 몰래 목 졸라 죽이고 이불을 덮었다가 고종에게 황후가 한 짓이라고 하여 결국엔 황후를 폐위시킨 뒤 많은 재상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새로운 황후에 오른다.
고종은 오래도록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660년부터 중풍으로 머리가 무겁고 눈앞이 침침해서 측천무후가 정무 처리를 돕기 시작했다. 683년 고종이 죽은 뒤 측천무후는 이미 황제와 다를 바 없는 위세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황태자 이철(李哲)이 중종으로 황위를 계승하였지만 중종은 무측천을 황태후로 받들었고, 측천무후는 정사를 모두 결재하였다. 그러나 중종이 즉위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 파당을 만들려 하였다는 이유로 측천무후는 그를 여릉왕(廬陵王)으로 낮추고 황위를 박탈하였고, 측천무후가 계속 국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녀는 우선 조정의 면모를 쇄신하기 위해 관복의 색상, 백관의 호칭, 관직명도 대폭 변경하였다. 5년 뒤(689年)에 반포된 조서에서는 자신이 창조한 글자가 들어있고,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하고 9월 9일 중양절 측천루에 올라 만백성이 보는 앞에 당나라를 주나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로 등극한다.
측천무후는 통치기간 동안 농업 생산을 중시해 둔전과 영전을 실행하였으며, 수리 공사를 펼쳤다. 농업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인구도 3천700만 이상으로 늘었으며, 수공업과 상업 및 교통이 동시에 번영했다. 자연스럽게 문화도 흥성했다. 무측천은 경학, 역사학, 문학을 모두 중시하였고, 여성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우리 역사와의 악연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는 당과 밀접한 관계였기 때문에 우리 역사 속에 그녀의 이름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녀가 직접 통치한 것은 아니더라도 당 고종이 661년 고구려를 압박하고 백제와의 전투를 지원했을 때, 662년 신라 문무왕 등과 합세해 백강에서 백제를 평정했을 때, 668년 고구려가 멸망당할 때도 황후로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 또 고구려가 평정된 지 5년 후 문무왕이 고구려 유민을 도왔다고 당이 토벌하려 했을 때, 안동도호부에 있던 설인귀가 토번전에 참전하기 위해 당으로 돌아간 틈을 타서 검모잠이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이에 678년 신라를 치기로 했을 때에도 무측천이 있었다. 발해와의 관계에서는 무측천이 직접 개입한다. 696년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이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고구려의 남은 종족과 함께 동쪽으로 망명한 후 무측천은 이해고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고 먼저 걸사비우를 죽인다.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하는 무측천은 이처럼 그다지 반가운 인물은 아니지만 중국의 역사가들은 그녀의 빛나는 정치업적을 칭송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능력 있는 사람을 임용했고, 재난 당한 백성을 구제했으며, 간언을 받아들였다. 또한 등문고를 설치하여 언로를 넓히고, 덕과 재능을 겸비하고 군주에 충성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관료가 되라는《신궤》라는 책을 몸소 집필하기도 했으며 법제를 강화했다. 무측천이 당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던 점에 대해서는 대다수 역사가들이 의견을 같이한다.
물론 부정적인 평가도 많다. 무측천이 나이가 들어 여릉왕 중종을 황태자로 다시 옹립한 뒤, 무씨와 이씨 사이와 갈등으로 정변이 일어났고, 그 결과 무측천은 폐위당하고 중종이 복위한 뒤 705년 구중궁궐에 갇혀 쓸쓸하게 여든 둘의 나이로 임종을 맞이한 것도 사실이다.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정적을 제거할 때 혹리를 이용하는 잔인함이 있었으며, 늙어서까지 수 많은 남총을 거느렸던 부도덕 때문에 신랄한 비난을 받기도 한다.
중국의 240명의 역대 황제 중에 유일한 여성이었던 무측천. 당시 그녀를 위해 건릉에 세운, 글자를 새기지 않은 비인 ‘무자비(無字碑)’는 찬란한 업적이 너무 많아 글로 표현 못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반면, 글자 그대로 무자비하게 친자식까지 죽인 과오가 기록될까 하는 두려움과 함께 죽기 직전 자신의 행적을 자성했기에 새기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추측도 하게 만든다.
측천무후
측천무후와 당고종의 합장묘인 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