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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광해군, 왕이 된 남자 광해군 그가 살던 시대의 국제정세는 어땠을까?

광해군

한자 : 光海君, 이명 : 李琿,

 
  • 저필자한명기(명지대 교수)
  • 생몰년생년 : 1575년 4월 26일(음) ~ 몰년 : 1641년 7월 1일(음)
  • 발행일2011년 6월 25일
  • 분류
 

내정의 난맥 속에 사라진 뛰어난 외교 감각

 


 

 삼중의 외압에 직면했던 시대

 

광해군대(1608~1623) 동아시아 질서는 격변하고 있었다. 1592년, ‘중화질서 바깥의 섬 오랑캐’로 치부되던 일본이 임진전쟁을 일으켜 명에 도전하면서 변화는 가시화되었다. 전쟁 이전부터 쇠망의 조짐을 보였던 명의 몰락은 대세가 되었고, 전쟁의 피해를 혹심하게 입었던 조선은 휘청거리고 있었다. 반면 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군사강국으로 부상했고,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建州女眞-後金) 또한 만주의 패자(覇者)가 되어 명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중화와 이적의 위상이 바뀌어 가던 당시 가장 괴로운 처지에 놓인 나라는 조선이었다. 명과 후금, 그리고 일본 사이에 끼여 있는 데다 군사적 역량 또한 가장 취약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쟁 이후 삼국은 모두 조선을 을러댔다. 명은 임진전쟁 당시 조선을 원조했던 소위 ‘은혜’를 내세워 조선에게 후금과의 싸움에 동참하라고 강요했고, 후금은 “중립을 지키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조선을 협박했다. 침략의 ‘원죄’가 있는 일본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곤경에 처한 조선을 느긋하게 주시하며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획책했다. 광해군이 1609년 ‘만세불공(萬世不共)의 원수(怨讐)’ 일본과 기유약조(己酉約條)를 맺어 전쟁 이전의 관계를 회복한 것은 삼중의 곤경 가운데 하나라도 벗어던지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상국’에게 입바른 소리를 했던 배짱과 혜안

 

광해군대 조선과 명∙후금과의 관계는 갈수록 꼬였다. 급기야 1618년(광해군 10) 후금이 명에 선전포고하고 무순(撫順)을 점령하자 조선은 양국 대결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렸다. 명은 후금 원정을 준비하면서 조선도 병력을 동원하여 동참하라고 강요했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의 포석이었다.
명의 요구를 처음 받았을 때부터 광해군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임진전쟁 당시 베푼 은혜는 인정하지만, 명을 위해 존망까지 걸고 후금과 싸울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명에 사신을 수시로 보내 파병이 어렵다고 호소했다. “미약한 조선군을 보내 봤자 후금을 제압하기는 커녕 작전에 장애가 될 뿐”이라는 것이 주된 명분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명은 “파병을 계속 거부할 경우, 조선을 먼저 손봐줄 수도 있다”며 협박했다. 상당수 조정 신료들은 “부모의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외면하는 것은 패륜”이라며 파병을 채근했다. 결국 광해군은 안팎의 압박에 밀려 군대를 보냈으나, 조∙명연합군은 1619년 ‘심하(深河)전투’에서 후금군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심하전투’ 패전 이후에도 명은 조선의 병력을 다시 동원하려고 하였으나, 광해군은 이를 거부하는 한편, 양국의 대결 속으로 말려들지 않으려 부심했다. 당시 조선의 최대 난제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과 요민(遼民-요동 난민)들을 처리하는 문제였다. 모문룡은 1621년부터 “후금에 빼앗긴 요동을 수복하겠다”며 철산, 용천, 의주 등 청천강 이북을 횡행하면서 후금을 자극했다. 그가 조선에 자리잡자 후금 치하에 있던 수많은 요민들이 압록강을 건너 평안도로 몰려왔다. 굶주린 그들은 조선 관민들을 상대로 극심한 약탈을 자행했다.
후금은 격앙되었다. 모문룡이 지척에서 자국의 배후를 위협하는 데다 수많은 요민들이 이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621년 12월 후금군은 모문룡을 잡으려고 용천을 기습했다. 모문룡은 달아나 목숨을 부지했지만 조선은 난감해졌다. 모문룡이 ‘시한폭탄’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과감했다. 모문룡에게 육지를 떠나 섬으로 들어가라고 종용하여 가도(椵島)로 밀어 넣었다. 당시 후금은 수군이 없었으므로 섬에 머물 경우 모문룡이 안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또 명 조정에 요민들을 송환해 가라고 촉구했다. 그들이 끼치는 폐해가 너무 커서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은혜를 베풀었다”고 자부하던 ‘상국’과 ‘상국 장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종사(宗社)를 지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결단이었다. 훗날 인조정권이 우유부단하게 모문룡에게 끌려다니다 정묘호란을 초래했던 것과 비교하면 광해군의 외교적 수완과 배포는 대단한 것이었다.

 

 광해군-G2 시대의 ‘반면교사’

 

광해군은 1623년 폐위되었다. 그를 쫓아낸 인조와 서인(西人)들은 ‘모후 인목대비를 폐하고 아우 영창대군을 죽인 것’, ‘부모의 나라 명을 배신하고 오랑캐 후금과 화친한 것’, ‘토목공사를 잇따라 벌여 민생을 피폐하게 한 것’ 등을 폐위의 명분으로 들이댔다.
‘폐위 명분’이 과연 합당한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재위 중반 이후 광해군이 신료들을 통합하고 내정을 추스르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첩자(妾子)이자 차자(次子)의 처지에서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올랐던 그는 시종일관 ‘왕권 강화’에 골몰했다. 그런데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자신에게 영합했던 몇몇 대북파(大北派) 측근들과 밀착하여 다른 정파나 신료들의 공론(公論)을 외면했다. 특히 공론 수렴의 중요한 통로인 경연(經筵)을 회피하면서 신료들과의 소통에 결정적인 문제가 생겼다. ‘소통’ 노력을 제대로 기울이지 않은 채 반대파 신료들의 간언(諫言)을 무시하며 결국 그들을 조정에서 쫓아냈다. 쫓겨난 신료들은 광해군이 취한 안팎의 정책들을 싸잡아 비난하였다.
그에 더하여 궁궐 건설 등 대규모 토목공사에 몰입하여 재정 문제가 불거지고 증세 조치를 취하면서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았다. 하층민들이 아우성을 치고 지방 수령들까지 동요하면서 쿠데타를 꿈꾸던 세력들은 거사를 위한 절호의 명분과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바야흐로 ‘G2 시대’ 한반도의 미래상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향후 미국과 중국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계속 서로 으르렁거린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존망을 좌우할 만큼 심각한 상황이 닥쳤을 때 우리는 과연 두 나라에게 ‘입바른 소리’를 할 수 있을까? 또 그러한 역량을 갖추고 내부 통합까지 이뤄낼 수 있을까? 광해군 시대의 ‘빛’과 ‘그림자’를 돌아보며 떠오르는 생각이다.

광해군부부의 묘
파진대적도
- 1691년 압록강을 건넜던 강홍립 휘하의 조선 원정군이 후금군과 맞서고 있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