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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독립운동가 윤봉길의사

윤봉길

한자 : 尹奉吉, 이명 : 禹儀, 호 : 梅軒,

 
  • 저필자김상기(충남대 교수)
  • 생몰년생년 : 1908년 6월 21일 ~ 몰년 : 1932년 12월 19일
  • 발행자동북아역사재단
  • 발행일2012년 3월 25일
  • 분류독립운동가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와 동양 평화

 

일본 도쿄의 야스쿠니신사 옆에 유슈칸(遊就館)이 있다. 이곳은 일본이 태평양전쟁까지의 침략전쟁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는 일종의 전쟁기념관이다. 피해를 입은 아시아인의 입장에서 볼 때 침략의 역사임에도 그들은 ‘자랑스런 영광의 역사’로 기리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2000년도 일본에 체류하고 있을 때, 이곳에서 혈흔이 묻은 군복을 유리관 속에 전시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바로 윤봉길의거 때 사망한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가와(白川義則) 대장의 군복이었다. 시라가와는 1932년 상해사변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라 하여 일본에서는 육군의 ‘신’으로까지 숭앙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일본 왕은 그가 죽기 전에 남작 작위와 욱일대훈장을 내리는 등 최고의 예우를 다하였다. 윤봉길의사가 대륙 침략의 원흉으로 여겨 처단한 그를 일본은 전쟁의 영웅으로 기리고 있었다. 누구의 지적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얼마 지난 뒤 그곳에 다시 갔더니 그 군복은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농민운동가에서 혁명운동가로

 

올해는 윤봉길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 8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윤봉길은 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에서 3·1운동을 목격하고 보통학교를 자퇴한 후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공동묘지 묘표사건을 접하고 한 사람의 무지는 무덤을 잃게 하지만, 민족의 무지가 나라를 잃게 하였다면서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동아일보와 개벽 잡지를 구독하면서 신학문을 접하고 아울러 민족문제를 직시한 그는 야학을 개설하여 한글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평등과 자유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는 자유는 누구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며 농민과 노동자의 민중적 자유 운동이 효과적임을 주장하였다. 농민회와 위친계를 조직하여 농산물의 재배법을 개선하고 공동판매를 실시하는 등 농가의 소득증대운동을 펼쳤으며, 월진회를 조직하여 문맹퇴치와 농촌경제향상을 꾀했다.
그가 의욕적으로 실시한 농민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것은 1929년 2월 야학에서 이솝우화를 각색한 ‘토끼와 여우’라는 학예회를 개최한 뒤부터였다. 다음 날 이 일로 덕산주재소에 호출된 그는 순사의 경고와 훈계를 받았다. 그는 농민의 계몽운동이 성공하려면 민족의 독립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농민운동의 한계에 대하여 심각한 고민을 하던 중에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전국에 울려 퍼진 광주학생운동의 소식을 듣고 그는 일기장에 “일본제국주의 타도 만세, 약소민족해방 만세, 노예적 교육철폐 만세”라고 적고 있다. 이어서 “함흥수리조합 일본인들이 조선인 3명을 타살. 아! 가엾어라. 이 압박, 어느 날 갚을는지”라고 일본인에 의해 한국인이 타살된 것을 분통해 하면서 민족적 압박에 대한 원한을 갚을 것을 다짐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은 그가 농민운동가에서 혁명운동가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의거를 통해 한중간 우호 협력의 시발점이 되다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유언을 남기고 부인 배씨에게 ‘물 좀 한 그릇 주오’라는 말로 영원한 이별을 고하고 상해를 향해 집을 나섰다. 상해에서 백범 김구를 만나 ‘마음의 폭탄’을 가슴 속에 지니고 왔다면서, 이봉창의사와 같은 임무를 맡겨줄 것을 청하였다.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고 왜적을 도륙할 것을 맹서한 그는 마침내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현 루쉰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전승기념식에서 시라가와 대장과 일본군 제9사단장 우에다를 비롯하여 상해점령의 승리를 외치던 침략의 원흉들에게 폭탄을 던졌다.
60여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전개된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홍구공원 의거만큼 성과가 지대한 것을 찾기가 쉽지 않다. 윤봉길의 의거는 상해파견군사령관 시라가와를 비롯한 수뇌부에게 철퇴를 가하는 큰 전과를 수립한 점에서 의미가 크다. 윤의사가 전승식을 박살냄으로써 일제는 ‘만주사변’ 이후 상해사변까지의 승리가 무색하게 되고 국제적 위신까지 꺾이게 되었다. 장개석 총통이 말한 대로 중국군 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윤 의사 혼자 해냈으니 엄청난 전과를 수립한 것이다. 윤봉길의 의거는 이름뿐이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체제를 강화시키고 독립운동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나아가 미국, 하와이, 멕시코, 쿠바 등에 사는 한인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납세와 후원이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윤봉길의 의거가 갖는 또 다른 의의는 만보산사건으로 악화된 중국인의 반한감정이 눈 녹듯이 풀어졌다는 점이다. 또한 한중연합 항일투쟁의 계기가 된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장개석과 김구간의 단독 회담이 이루어져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여 한인 장교를 양성하게 하였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한중연합전선이 형성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윤봉길의 의거 소식을 라디오로 청취한 중국의 요녕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 사령관 당취오(唐聚五)는 조선혁명군 참모장 김학규와 합작 협정에 서명하고 영릉가전투와 같은 한중연합전투를 수행하여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후 한중 양국이 우호와 협력의 길을 쌓아 온 것 역시 홍구공원 의거의 영향이 크다 하겠다.

 

 일본은 윤의사 순국지를 공개하여 한일 간 화해를 위한 초석으로 만들기를

 

그러나 일제는 홍구공원의거로 인해 자신들의 자존심이 심하게 손상되었다고 여겼다. 그 결과 원한을 윤봉길에게 되갚고자 하였다. 시라가와가 죽기 하루 전인 5월 25일 신속하게 윤의사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으며, 시라가와가 죽은 시각에 맞춰 윤의사의 총살 명령을 내렸음이 확인되는데, 이는 시라가와의 죽음에 대한 원한으로 윤봉길을 ‘순장’시키고자 한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가나자와(金澤)의 으슥한 산림 속까지 끌고 가 총살형을 집행했는데, 이는 제9사단장 우에다가 다리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은 데에 대한 보복적 성격이 강하다.
일제는 윤봉길을 사형시키면서 형틀에 무릎을 꿇린 채 묶고 총격을 가하는 비인도적인 처사를 자행했다. 윤봉길은 북풍이 부는 깊은 산속에서 외롭게 순국하였다. 아무리 애써 침착하고 담담한 듯 했지만, 추운 새벽 스산한 산속에서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 것인가. 윤의사가 사형을 당한 곳은 지금도 일본 자위대의 작업장 내에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순국지의 정확한 위치마저 확인하기 곤란한 실정이다. 다행히 일본 방위연구소 도서실에 소장된 『만밀대일기(萬密大日記)』에 사형전말보고서와 순국지의 약도가 들어 있고, 1933년 발행된 가나자와의 지형도가 입수되어 순국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윤의사의 순국지를 찾아 그의 순국의 뜻을 기리고 숭고한 넋을 위로하는 진혼제를 올리기를 희망한다. 순국지에서의 진혼제는 진혼 이상의 의미가 있다. 윤의사가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동양의 평화와 공존의 세계를 80년이 지난 한일 양국인들이 서로 만들어가자는 약속의 장이 되는 것이다. 일본은 윤의사의 순국지를 일반인에게 공개하여 한일 간의 화해와 우호적인 미래를 건설하는 초석이 되도록 하였으면 한다.

의거 후 체포된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 의거를 보도한 일본신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