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영
한자 : 大祚榮, 시호 : 高王
- 저필자김은국(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생몰년 ~ 몰년 : 719년 (음)
- 발행일2011년 11월 25일
- 분류왕
대조영, 고구려 유민 디아스포라의 종결자
668년 당나라는 고구려(高句麗)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보장왕(寶藏王)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구려 유민을 이주시켰다. 이주된 유민들 중에는 말갈 등 주변 민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중국 영주(營州)에는 당나라에 의해 이주된 여러 민족들이 거주하였다. 7세기 후반 동아시아 각 민족은 당나라가 책봉(冊封)과 조공(朝貢)이라는 상징적인 기미(羈縻) 통제에 대하여 저항을 시작하였다.
고구려 유민 역시 이즈음 고구려 재건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고구려 멸망 후 30년 만인 698년, 고구려 유장 대조영(大祚榮)은 고구려 유민과 주변 민족을 거느리고 영주를 벗어나 동모산(東牟山: 중국 길림성 돈화)에 이르러 진국(振, 震)이란 국호로 발해 건국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그야말로 세상에 고구려 재건을 만방에 떨친다는 의미였다.
대조영은 698년부터 719년 훙거(薨去)하기까지 재위에 있으면서 발해 건국의 기틀을 다져 놓았다. 그의 시호(諡號)는 고왕(高王)이다. 고왕은 건국 직후 당나라에 대한 대비를 취하면서 동시에 주변 국가들과 교류를 추진하였는데 그것이 고왕 2년 신라(新羅)와의 교섭이다. 신라 효소왕(孝昭王)은 발해 사신을 맞이하고 고왕에게 신라 제5품에 해당하는 대아찬(大阿飡) 직을 내렸다. 이러한 차등은 당시 안정적이던 신라와 신흥 발해국과의 국격(國格) 차이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때의 사실을 기록한《三國史記》에는 발해를 북국(北國)이라 나타내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발해와 신라를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라 칭하는 근거의 하나다.
또 발해가 동해안을 따라 신라와의 대외교류를 위해 설치한 신라도(新羅道)를 통해서도 남북국의 왕래와 교류를 살필 수 있다. 남북국의 교섭은 결국 713년에 당나라가 발해를 국가로 인정하게 하였다. 이것은 무왕(武王)과 문왕(文王)이 이룬 발해의 국력과 국격 형성에 디딤돌이 되었으며 이후 발해는 15대의 왕이 220여 년간 계승하면서 ‘해동성국’으로 칭송을 받을 만큼 발전하여 갔다.
발해 건국과정에서 볼 수 있는 고왕 대조영의 이미지는 고구려 유민 디아스포라(Diaspora : 민족의 이산, 이주를 의미)의 종결자로서 산재한 고구려 유민 대표 리더의 등장이다. 즉 발해의 건국은 ‘고구려 유민 디아스포라의 재집결’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발해를 기억하는 동아시아
발해 역사 영토 대부분이 현재 중국 동북삼성 지역, 러시아 연해주 그리고 북한에 걸쳐 있는 관계로 발해는 더 이상 한 나라의 역사로 규정될 수 없게 되었다. 자연스레 발해사를 보는 자국 중심적인 인식도 강하게 작용해서 각국이 보는 발해사 인식에 서로 다른 차이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발해는 이미 동아시아의 국제학 분야가 되어 있다.
지난 1998년 남∙북한, 중국, 러시아, 그리고 일본 등에서는 발해 건국 1300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다양하게 치른 바 있다. 국제학술회의와 발해 항로 탐사 시도, 그리고 여러형태의 역∙저술 간행 등으로 이어졌다. 그때 러시아는 발해 1300주년을 기념하여 인삼주를 선보이기까지 하였다. 한국의 경우는 ‘발해 1300호 뗏목’의 발해 항로 탐사 출발과 안타까운 좌초 소식이 학술회의의 한 켠에서 들려오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부른 ‘발해를 꿈꾸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분단시대에 꿈틀대던 남북국 인식의 다양한 표출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방송된 사극 〈대조영〉은 세계에 한류 드라마 바람을 일으켰고, 대조영을 기억하려는 동아시아인의 노력은 계속 이어져 왔다. 재단에서도 2008년 〈발해와 동아시아〉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여 발해사연구의 국제적인 관심을 한자리에 모았다.
최근, 대조영에 대한 관심은 더 적극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11월 17일 우정사업본부에서는 대조영 기념 특별우표세트를 선 보였다. 이번 우표 발행의 화두는 ‘우표로 재조명하는 발해 건국이야기’다. 발해 건국과 관련한 4가지 주제를 통해 발해가 우리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가졌고,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고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여 ‘해동성국’을 이루었음을 상징화하고 있다. 이것은 발해국 국격 복원이라할 것이다.
또한 대륙과 해양을 같이 경영한 해륙국가(海陸國家)였던 발해는 당시 동해(東海)를 통해서는 일본과 빈번한 사신 왕래를 하였으며, 서해에서는 당과의 해전과 교역 등에 발해 항해술과 조선술의 수준을 반영시켰다. 이러한 기상을 이어받아 ‘대조영’이라는 이름이 한국해군 전함에 당당히 사용되어 최근 소말리아 해역의 해적 소탕에도 투입되어 그 명성을 드높였다.
고왕과 발해 국격
다시 눈을 발해 역사 무대인 중국 동북지방으로 돌려보자. 최근 중국 내 대표적인 유적지 보존과 공원화가 추진 중인데, 발해 유적인 상경성이 위치한 곳에 발해 고왕 대조영의 동상을 세워 놓았고, 동모산이 있는 발해 건국지인 현재의 돈화에는 발해광장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조형물의 내용과 형식을 보면 중국의 발해사 인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발해를 당대의 지방 소수민족이 건립한 정권이고 당나라의 책봉과 조공국으로 규정하고 있다. 발해사 인식에 대한 동아시아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발해 국격과 고왕 칭호 사용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의 재건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것은 뛰어난 통솔력과 용맹함 외에도 30년 간 지속적으로 추진한 고구려 유민의 결속 노력이 빚어낸 결과다. 건국 이후에는 주변 국가 어디와도 통할 수 있도록 개방 국가의 초석을 다졌다. 이제 우리는 ‘해동성국’으로 칭송된 발해에 걸맞게 그 건국자인 대조영을 시호인 고왕으로 부름으로써 그 국격을 높여야 한다. 발해 고왕은 발해 멸망 이후 한민족의 디아스포라가 향하는 표상이기 때문이다.
아! 그러고 보니 마침 이번에 나온 우표를 붙여 고왕이 있는 발해국 그곳으로 세월의 안부 몇 통이나마 전하고 싶구나.
고왕 대조영 동상 모습
대조영함(大祚榮艦) DDH 997
우정사업본부 발행 대조영 기념 특별우표세트(2011.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