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
한자 : 張保皐, 이명 : 張寶高, 弓福, 弓巴,
- 저필자윤재운(대구대 교수)
- 생몰년 ~ 몰년 : 846년 (음)
- 발행일2011년 12월 25일
- 분류상인, 호족
해양상업제국의무역왕장보고
몇 년 전, 방송 드라마로 절찬리에 방영된 ‘해신(海神)’이라는 프로그램을 다들 알고 계실것이다. 해신이란 바다의 신이란 뜻으로, 일본에서 장보고(?~841)를 신격화한 것에 착안하여 소설로 쓰인 것을 드라마로 각색한 것이다. 그렇다면 장보고가 어떤 인물이기에 일본에서 신격화되었던 것일까?
장보고의 생애는 그 이름에 남아 있다. 장보고를 부르는 이름은 넷이나 된다. 우리 측 기록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활보 즉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 그리고 장보고(張保皐)로 되어 있고, 중국 측 기록인 《번천문집》, 《신당서》는 모두 장보고(張保皐), 일본 《입당구법순례행기》와 일본 정사인 《일본후기》·《속일본기》·《속일본후기》에는 장보고(張寶高)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신라 관습으로 보아 평민은 성(姓)을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장보고가 신라에서 궁복이나 궁파로 불렸다는 것은 그가 평민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궁복이나 궁파는 우리말로 ‘활보’ 즉 ‘활을 잘 쏘는 아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다. 궁복 또는 궁파라고 불리던 한 신라소년이 큰 뜻을 품고 당나라에 간 것이다.
장보고는 고향이 현재 전라남도 완도로 추정되는 섬사람이다보니 수영을 아주 잘했고 소년시절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다. 의리와 정의감이 깊고 도량이 한없이 넓어 국내외에서 존경하며 따르는 이가 많았다. 그와 일생 동안 동고동락했던 고향친구 정년(鄭年) 또한 무술이 뛰어났고 50리 물속으로 자맥질해도 숨이 차지 않았다고 기록될 만큼 재주가 비상했다. 장보고는 정년과 함께 소년시절 당나라에 건너가 마침내 지금의 강소성 서주(徐州)에서 당나라 군관벼슬인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직까지 올라갔다. 장보고가 당나라에 건너갔을 당시 중국은 평민들도 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장보고는 중국에서 활동하기 위해 자신 이름 가운데 ‘궁(弓)’자에 착안해 장씨(張氏)라는 성을 갖게 된 것이다. 보고라는 이름은 ‘복’의 음을 그대로 따라 지은 것으로 보인다.
동방의 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
당나라에서 귀국한 이후 장보고는 오늘날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당시 일본 측 기록에 장보고(張寶高)라 적고 있는 것은 무역을 통해 거대한 부를 얻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즉 오늘날로 따지면 재벌 정도 되는 의미다. 따라서 사료에 남아 있는 이름은 화려했던 그의 일생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장보고에 대한 최초의 평가는《번천문집(樊川文集)》의 저자 당나라 사람 두목(杜牧, 803~852)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기록은 장보고가 살던 당시에 기록된 것으로 가장 사실에 근접한 평가로 간주할 수 있다. 두목은 장보고를 안록산의 난 때에 활약한 곽분양(郭汾陽)에 비유하였다. 아울러 그는 장보고가 명철한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써 동방의 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이것은 신라인 장보고가 당시에 중국 내에 널리 알려져 있는 존경받는 인물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고려시대《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은 열전에서 장보고를 진(晉)의 기해(祈奚) 또는 당나라의 곽분양에 비견되는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김유신 열전 편에서 ‘비록 을지문덕이 지략이 있고, 장보고가 의리와 용맹이 있다 하더라도 중국 사서(史書)가 아니면 그 자취가 없어져 위대함이 알려지지 못할 뻔하였다’고 덧붙이고 있음을 볼 때, 장보고에 대한 평가는 고려시대에 이미 객관적인 관점을 회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점차 중앙집권적인 국가권력체계가 공고화되었고, 왕조에 대한 충성 논리가 강조되던 조선시대에는 장보고가 정당한 평가를 받기가 어려웠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근대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세계사 주역은 다름 아닌 오대양을 주름 잡을 수 있는 역량을 가진 해양 강국들이었다. 개항기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세계속에 한국을 꿈에 그리던 우리 선각자들 눈에 장보고는 그야말로 우리 민족이 나가야 할 길을 보여준 것이다. 예컨대 최남선이 《해상대한사(海上大韓史)》에서 서술한 것은, 망각되었던 우리 민족의 해양 기질을 되찾아야만 세계 주역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 나라의 해운산업과 국제무역의 효시
우리나라에서 장보고의 업적에 관하여 최초로 연구논문을 쓴 김상기 교수는, 장보고야말로 우리나라 역사상 ‘바다를 다스리는 자가 세계사를 지배한다’는 원리를 몸소 실천한 문자 그대로 ‘해상왕국의 건설자’라 주장한 적이 있다. 그리고 주일미국대사를 지낸 바 있는 미국 하버드대학의 고(故)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 교수는 장보고를 ‘해양상업 제국의 무역왕(The Trade Prince of the Maritime Commercial Empire)’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국내에서는 장보고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일부 학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평가를 받는 장보고는 중국과 한국 및 일본 바다를 신라인들의 일터로 가꾸고, 나아가서 중국 산둥반도 일대와 한반도 남부지방을 마치 자치지역처럼 독자적으로 제어했다. 장보고의 해상활동은 이순신보다 7백여년을 앞섰다. 지금으로 보면 최초로 동양세계의 해상권을 지배한 막강한 해군력을 과시하였고, 최근 세계적으로 눈부시게 뻗어나는 우리나라의 해운산업과 국제무역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는 동북아시아 지역 교통·지리·경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륙과 대양을 연결하고 있다. 특히 서남해안은 환황해권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어서 동북아시아 경제권의 형성과 지속적인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지역이다. 서남 해안을 중심으로 활약한 장보고의 도전 정신, 개척정신, 포용력있는 해양 경영은 21세기 해양 경영 모델을 재구성, 재창조하기 위해 반드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아울러 9세기 당시 장보고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 민족 역량의 결집이 있었다. 지금 중국에는 200만명, 연해주 등지에 50여 만 명, 일본에 70여 만 명 그리고 남북한에 6천 700만 명을 합하여 약 7천만 명의 한민족이 주로 동북아시아 지역에 밀집해 있다. 9세기 당시 고구려·백제 유민과 신라인들이 중국대륙과 일본에 퍼져 있던 양상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인적자원을 어떻게 결집시킬 수 있을지는 우리에게 남겨진 또 하나의 과제다.
중국 산동성 영성시에 있는 장보고 기념탑
청해진의 본부였던 장도의 현재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