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조선후기 선린우호 일본의 쓰시마 번 외교관 아메노모리 호슈

아메노모리 호슈

한자 : 雨森芳洲, 이명 : 雨森東,

 
  • 저필자홍성덕(전주대 교수)
  • 생몰년생년 : 1668년 (음) ~ 몰년 : 1755년 (음)
  • 발행일2012년 6월 25일
  • 분류문신, 학자, 외교관
 

조선후기 선린우호 외교의 개척자,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270년 전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했던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는 성의(誠意)와 신의(信義)의 교제를 신조로 삼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신외교의 상징으로 아메노모리 호슈가 등장한 것은 1990년 일본을 방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궁중만찬회 연설 때였다. ‘상호 존중과 이해의 바탕 위에서 공통의 이상과 가치를 향해 발전해 갈 수 있다’는 역사적 연원을 호슈에게서 찾은 이 연설은 일본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당시 호슈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던 일본인들은 법석을 떨어야 했고, 조선후기 한일관계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하여 한일관계사연구의 새로운 마당을 열기에 이르렀다. 호슈의 성신외교론은 조선후기 일본의 조선침략으로 단절된 두 나라의 외교관계가 재정립되는 과정에서 미래지향적인 가치로서 여전히 평가받고 있다.

 

 의사의 꿈을 접고, 유학자가 되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1668년 지금의 사가현 이카군 다카츠키초(滋賀縣 伊香郡 高月町)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숙부가 모두 의사였던 집안에서 의사의 가업을 이어야 했던 호슈 역시 아버지가 일하고 있던 교토에서 의사가 되기 위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교토의 명의 다카모리의 문하에 들어간 호슈는 “종이를 쓸데없이 소비하는 행위는 그래도 낫다. 그러나 소중한 인간의 목숨을 소비하는 일에는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하여 죽을 정도의 고통을 맛보고서야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스승의 말에 의학공부를 포기했다. 18세 때에 에도에 가 일본 근세 중기의 유학자인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의 문하에 들어갔다. 기노시타의 문인이 된 호슈는 유학자로서의 소양을 갖추게 되고, 소위 기노시타 준안의 열제자(木門十哲)에 들게 되었다. 기노시타 문하에서 배출한 걸출한 열명의 제자들 중에는 일본국왕호의 사용 등 통신사 관련 제도 개혁을 주장했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조선통교대기」를 지은 마쓰우라 가쇼(松浦霞沼), 18세기 초 교호(享保) 개혁을 맡았던 무로 규소(室鳩巢), 일본 문인화의 시조인 기온 난카이(祇園南海)등이 포함되어 있다.

 

 조선 외교의 발을 들여 놓다

 

1689년 22살이 된 호슈는 준안의 소개로 에도의 쓰시마 번저(藩邸)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쓰시마번의 번저에서 쓰시마 번주의 학문을 담당했던 호슈는 1693년 비로소 쓰시마에 들어가 신분야쿠(眞文役), 조선가타고요시하이사이야쿠(朝鮮方御用支配佐役)로서 쓰시마번에서 조선에 보내는 외교 문서의 초안 작성과 번역, 조선 역관 등의 접대를 담당하였다. 당시 한일관계는 1678년 초량왜관의 신축 이후 일본인들의 왕래가 강화되고, 계속 늘어나는 일본인들로 인해 두 나라 사이에는 무역을 둘러싼 갈등과 조선 역관들과의 은밀한 커넥션 등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으며, 1609년 기유약조 체결 이후 조선의 대일통제가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쓰시마번은 누적된 재정적자로 인해 호슈의 말처럼 ‘소라껍데기’같은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호슈는 1702년 번주 소 요시자네(宗義眞)의 은퇴를 알리는 참판사(參判使)의 도선주(都船主)로 처음 동래의 초량왜관에 왔다. 와서 3년 동안 체류하였다. 1713년, 1720년 두 차례 도선주로 왜관을 왕래한 호슈는 1728년에 이르러 조선과의 외교를 전담하는 재판(裁判)의 자격으로 조선에 왔다. 재판이 되기 앞서 호슈는 1711년과 1719년 조선에서 파견한 통신사를 쓰시마번의 신분야쿠(眞文役)로 수행하기도 하는 등 조선 외교 전문가로서의 길을 꾸준히 걷고 있었다.

 

 교린(交隣)에서 중요한 것은 통역관이다.

 

호슈가 쓰시마번에서 일하기 시작 할 즈음 그는 외교에서 통역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고 조선에 파견되기 앞서 1696년부터 2년간 나가사키에 가서 중국어를 배웠으며, 왜관에 체류할 때에는 경상도의 방언까지 구사할 정도로 외국어 공부에 집중하였다. 호슈는 ‘이웃 나라와 사귐에 있어 통역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하여 통역관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호슈는 통역관은 말만 잘 해서는 안 되며, 인품도 뛰어나고 재치 있고 의리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때문에 그는 “쓰시마는 일본을 대표해서 조선과 교류하는 번이기 때문에 학문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여 조선어 교육을 강조하였다. 그의 이런 생각은 조선어 회화 입문서인 『교린수지(交隣須知)』(1703)를 비롯하여 『인교시말물어(隣交始末物語)』(1714), 『교린제성(交隣提醒)』(1728), 『치요관견(治要管見)』(1735) 등과 같은 조선관련 외교서 등을 집필하였다. 특히 그는 조선어 학습을 위해 학습 단계에 따라 4책의 교재(「韻略諺文」, 「酬酢雅言」, 「全一道人」, 「 履衣椀」)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외교는 살아있다.

 

1711년 쓰시마의 신분야쿠로 통신사행 업무를 담당한 호슈는 통사행의 외교 관례를 바꾸려는 아라이 하쿠세키와 갈등하게 된다. 외교에서 외교관이 수행하는 모든 일은 사전 협의를 통해 이루어진다. 즉 통신사행의 파견 일정, 숙박지, 접대의 방법, 외교문서의 형식과 내용, 외교 의례 등이 주요 협의 대상이다. 때문에 한 번 정해져 수행한 행위는 ‘전례(前例)’로서 확인 수준의 절차를 밟게 되며 새로운 사안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게 된다. 그런데 1711년에는 가장 중요한 일본 장군의 호칭을 종래 사용하던 다이쿤(大君)에서 국왕(國王)으로 바꾸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외에도 숙박처 및 접대의례 등의 변경이 있었으나 통신사행은 쓰시마에 도착해서야 이를 파악하였다. 이같은 외교적 결례와 국왕호의 사용 결정에 대해서 호슈는 “교린의 예를 바르게 하고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게 하는 것은 찬성하지만, ‘왕으로 호칭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다.”는 편지를 같은 기노시타 문인이었던 아라이 하쿠세키에게 보냈다. 이에 하쿠세키는 ‘쓰시마에 사는 미숙한 학자 따위’가 쓸데없는 간섭을 한다고 감정적인 비판을 보냈다. 호슈는 통신사행 수행 내내 자신의 생각과 다른 외교 업무를 수행하면서 그야말로 녹초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국왕호에 대한 호슈의 생각은 국왕호의 사용이 일본의 텐노(天皇)을 얕보는 불손한 행위로 보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교류한다는 것은?

 

아메노모리 호슈의 조선에 대한 사상과 외교대책은 『교린제성』에 집약되어 있다. 『교린제성』의 첫줄에 호슈는 조선과 교제를 함에 있어 ‘인정과 사세 즉 풍속이나 관습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상대국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외교의 출발이라는 점이다. 그리 마지막 항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신(誠信)으로 교류한다고 말을 하는데, 이 글자의 뜻을 잘 모르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성신이라는 것은 진실된 마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진실을 가지고 교제하는 것을 성신이라고 말한다”로 마무리하고 있다. 아메노모리 호슈의 ‘성신외교’는 조선후기뿐만 아니라 21세기 한일관계의 미래지향적 가치임에는 분명하다. 그렇지만 호슈는 줄곧 정확하게 알아야만 속지 않을 수 있고 다투지 않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성신을 말한 대목의 아래에는 조선이 일본의 송사를 접대하는 것은 일본의 위세(임진왜란의 무위)를 두려워하기 때문인데, 쓰시마 사람들이 무의(武義)를 잃고 학습을 태만히 하여 아무개의 나무칼(何某之木刀)된 것을 한탄하고 있다. 외교는 스스로의 본위가 바로 잡힐 때 성신일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 아닐까? 호슈가 말한 성신외교의 긍정적 가치와 그 내면의 숨은 뜻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아메노모리 호슈
교린수지
- 조선어 회화 입문서
아메노모리 호슈 현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