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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백성을 생각한 태평성대 시대를 만든 세종대왕

세종

한자 : 世宗, 이명 : 李祹, 元正, 시호 : 世宗, 莊憲大王

 
  • 저필자신병주(건국대 교수)
  • 생몰년생년 : 1397년 4월 10일(음) ~ 몰년 : 1450년 3월 30일(음)
  • 발행일2012년 9월 25일
  • 분류
 

세종대왕, 시대정신을 설정하고 목표를 완수하다

 

 

 자주, 민본, 실용을 시대정신으로 하다.

 

1392년 건국된 후 조선은 중국과의 사대(事大)를 외교의 최우선 과제로 인식했다. 그리고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인정했다. 사대 외교는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중국의 선진 문화를 수용하려는 실리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인정하면서 그 문화를 수용한 조선 역시 중국 다음으로 큰 나라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1402년 태종대에 작성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이러한 세계관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세종은 이러한 흐름을 적극 계승했다. 조선이 건국된 후 30여 년이 지난 즈음 왕위에 오른 세종(1397~1450, 재위 : 1418~1450) 시대는 중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대가 아니라, 중국의 사대 외교로 얻은 안정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적인 문화를 정착시키는데 역량을 집중해야 하는 시기였다. 세종은 조선이 나아갈 국정의 이념을 자주, 민본, 실용으로 삼았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이러한 이념이 압축된 성과였다.
1446년 9월(음력) 오랜 연구 끝에 세종은 우리 글 훈민정음, 즉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를 반포하였다. 1443년에 만든 후, 3년 동안이나 궁궐에서 여러 학자와 대신들이 시험 삼아 사용해 보고 이를 온 백성들에게 보급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특히 창제 동기를 밝힌 서문의 존재로 인해 훈민정음은 더욱 빛이 날 수 있었다. 한자나, 알파벳 문자에 무엇 때문에 그 글자를 만든다는 명확한 목적이 적혀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28자의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훈민정음의 문자 모양은 발음기관과 삼재(三才 : 천[天], 지[地], 인[人])의 모습을 닮고 문자 조직은 주역 철학의 원리를 응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훈민정음은 우리말을 가장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문자로, 소리가 나는 대로 쓸 수 있어 많은 백성들이 문자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훈민정음에 대한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최만리, 김문 등은 무엇보다 중국과의 관계를 문제로 삼았다. 최만리는 1444년 2월 중국과 다른 문자를 쓰는 것은 사대의 예에 어긋난다면서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세종은 이러한 반대 의견을 논리적으로 비판하고, 적극적으로 훈민정음의 반포를 주도해 나갔다. 중국과는 다른 우리의 독자적인 문자, 어리석은 백성 누구나가 쉽게 쓸 수 있는 글자의 창제는 조선의 자주성과 민본, 실용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농업, 의학, 과학의 성과들

 

세종 시대는 무엇보다 우리 농법, 우리 과학, 우리 문화, 우리 음악에 대한 애정이 충만한 시대였다. 세종은 중국과는 다른 우리 고유의 농업과 의학 그리고 과학과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그것은 다양한 성과물로 나타났다. 1429년(세종 11)에는 우리 땅에 맞는 농법서인《농사직설(農事直說)》이 간행되었고, 1433년(세종 15)에는 우리 산천에서 생산되는 약재로 처방법을 제시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완성되었다. 농업생산력의 증대에는 정확한 농시(農時)가 절실히 요구되었고, 농시에 대한 중요성은 간의대 등 천문기구와 시계, 측우기 등 각종 과학기구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달력의 제작에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기존에는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이나 명나라의 대통력(大統曆), 아라비아의 회회력(回回曆)과 같은 달력을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역법 체계와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세종은 1444년(세종 26)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이라는 독자적인 달력을 만듦으로서 보다 더 정확하게 일력(日曆)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함께 하는 정치

 

세종의 정치를 특징짓는 키워드는 ‘함께하는 정치’였다. 자신이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였음에도 세종은 독단적으로 정국을 운영하지 않았다. 전국의 인재들을 불러 모으고 이들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공법(貢法)이라는 토지 세법을 정할 때 17만 명에 이르는 백성들에게 직접 의견을 물어본 것이라든가, 집현전을 설치하여 최고의 인재들로 하여금 국가 정책을 만들게 한 것, 천민 출신의 과학자 장영실의 발탁은 세종의 포용적인 리더십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북방 개척에도 힘을 기울여 최윤덕과 김종서 등으로 하여금 4군 6진을 쌓아 압록강 두만강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오늘날 한반도의 영토를 확보함으로써 조선의 안정은 물론 동북아시아 전체의 안정에도 기여한 것이다. 이외에도 세종은 박연과 같은 음악가, 황희, 맹사성, 유관, 허조와 같은 청백리 정승들을 배출시켰다. 세종 시대에 유난히 많이 인재가 등장하는 것은 ‘함께하는 정치’의 리더십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함께하는 정치의 중심 기관이 된 곳은 집현전이었다. 세종은 즉위 후 바로 집현전을 학문과 정책의 중심기구로 발전시켰다. 세종은 집현전을 완전한 국가기관으로 승격시켜 학문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최항 등 뛰어난 학자들이 속속 집현전에 모여들었다. 집현전에서는 주로 고제(古制)에 대한 해석과 함께 정치 현안의 정책 과제들을 연구하였다. 주택에 관한 옛 제도를 조사한다거나 중국 사신이 왔을 때의 접대 방안, 염전법에 관한 연구, 외교문서의 작성, 약초 조사 등 다양한 연구와 편찬 활동이 이곳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인간 세종

 

세종은 1397년 태종과 원경왕후의 3남으로 한양의 준수방에서 태어났다. 1408년 충녕군에 봉해졌다가, 1418년 6월 형님인 양녕대군이 폐출되면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두달 후인 1418년 8월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태종이 스스로 상왕이 되면서 물려준 왕위였다. 당시 태종이 세종을 후계자로 지명한 논리는 ‘택현(擇賢)’이었다. 세종은 화려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으로는 많은 아픔을 겪었다. 왕비를 비롯하여 자식을 저 세상에 먼저 보내고 불교에 관심을 보인 적도 있었다. 즉위 초에는 태종에 의해 장인이 처형되고, 장모가 관노비가 되는 가슴 아픈 상황도 있었다. 일생을 따라다닌 안질과 당뇨병 등의 질병은 그의 왕성한 활동을 제한하는 악재로 다가왔다. 그러나 세종은 물러서지 않았다. 최고 통치자로서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쏟아 붓는가 하면 모든 관리와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임으로써 누구나가 자발적으로 시대의 과제 해결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각종 질환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역사적 책무를 다한 국왕 세종, 어려움을 뚫고 최선의 성과물들을 후손에게 남겨 주었기에 그의 모습은 더욱 아름답게 다가온다.

세종대왕 영정
- 김기창 作


세종이 즉위식을 올린 경복궁 근정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