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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당나라로 간 고족유 그는 누구인가?

고족유

한자 : 高足酉,

 
  • 저필자김현숙(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생몰년생년 : 626년 (음) ~ 몰년 : 695년 (음)
  • 발행일2010년 6월 25일
  • 분류장군
 

한 발 앞서 세상을 읽은 사나이, 고족유의 삶

 

고구려가 망하기 전에 당으로 간 사람이 여기 한 명 더 있다. 연개소문의 자손 다음으로 고위직에 올랐던 고족유(高足酉)라는 사람이다. 고족유는 그의 묘지석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사람이다. 묘지석은 중국 하남성 낙양시 이천현 평등향 누자구촌 서북쪽에서 출토되었다. 묘지석의 높이와 너비는 각각 58.5㎝이고 묘지명은 1행 34자씩 모두 33행으로 되어 있다.
고족유에 대한 기록은 중국 사서와 우리 역사책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는 당으로 간 후 668년에 명위장군(明威將軍) 수우위위진화부절충도위잉장상(守右威衛眞化府折冲都尉仍長上)이 되었다가 수좌위위효의부절충도위(守左威衛孝義府折衝都尉)로 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운휘장군(雲麾將軍) 행좌무위익위부중랑장(行左武衛翊衛府中郞將)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679년 우령군위장군(右領軍衛將軍)이 되었고 680년에는 상주국(上柱國)으로 가훈되었다. 689년에는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그 다음해에는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좌표도위대장군(左豹韜衛大將軍)이 되었다. 그리고 695년에는 고려번장(高麗蕃長) 어양군개국공(漁陽郡開國公)에 봉해졌다. 보장왕과 연개소문의 후손이 있는 상태였지만 역사책에 이름도 나오지 않는 고족유가 고구려 유민의 대표격인 고려번장이 된 것이다.

 

 조상에 대한 언급이 없는 묘지명

 

고족유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의 묘지명에는 특이하게도 선조(先祖)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본래 은성한 집안이었다(族本殷家)”란 표현은 나오지만 고구려에 있을 때 어떤 관직을 역임했는지도 적어 놓지 않았다. 고족유의 출신성분에 대해 방계 왕족이었을 것인데, 묘지의 찬자가 자세한 내력을 몰라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 연구자도 있다. 또 은가(殷家)라 표현해 놓은 데서 중급의 부유한 지주계급이었으리라고 본 연구자도 있다. 그러나 묘지명에는 그렇게 볼 수 있는 내용이 없다. 다만 평양출신이고 당에서의 활동내용으로 보아 귀족출신이었을 것이지만 천헌성처럼 고위 귀족 출신은 아니었으리라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당에서 그가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에서의 지위나 출신성분 때문이 아니라, 노력의 결과였다고 본다.
묘지명에는 그가 앞일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적혀있다. 기미를 미리 알아차리는 통인(通人)인지라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에 당에 투탁했다고 되어 있다. 입당할 때 그는 마흔이 넘은 나이였다. 혼자가 아니라 가족 전체를 이끌고 갔다. 아무리 나라가 위태롭다는 것을 미리 알아차렸더라도, 마흔이 넘은 나이에 가족 전체를 이끌고 고국을 떠나 적국으로 갈 결심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장고에 장고를 거듭했을 것이다.
당으로 간 후 그는 노력을 거듭해 자신의 지위를 계속 높여갔고 마침내 천추를 건립할 때에는 고구려의 대표자 대우를 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일흔이었다. 측천무후의 성덕을 기리기 위해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모여 현란한 조각으로 장엄하게 만들어 올린 천추에는 그의 이름 석자도 적혀 있었을 것이다. 그로서는 자신 뿐 아니라 가족의 운명까지 모두 걸고 한 모험과 끝없는 노력 끝에 얻은 영예였다.
그런데 그는 최고의 절정기인 그 해에 죽음을 맞이했다. 경략대사(經略大使)가 되어 만족(蠻族)을 정벌하러 갔다가 큰 공을 세우고 개선하려던 차였는데, 그만 병에 걸려 형주(荊州, 중국 호북성 양주부근)의 관사에서 죽고 말았던 것이다. 일흔 살의 노구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던 것이다. 이도 역시 고위관직에 있었던 유민이라 하더라도 타국에서의 삶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고구려를 떠난 남자들의 빛과 그림자

 

그래서인지 유민들의 평균 수명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헌성처럼 모함을 받아 처형당하거나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천남산은 63세까지 살았지만 천남생은 46세, 천헌성이 42세, 고자가 33세, 고현이 49세에 사망했다. 천비는 22세에 요절했다. 물론 이는 관련 기록이 남아 있는 소수의 사람들의 경우만 들었으므로 전체 고구려유민의 상황을 반영한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일단 확인되는 사람들의 경우만 보면 4, 50대에 죽은 사람들이 많다. 일흔까지 산 고족유는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두드러진 활동을 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경우가 있었다. 천헌성, 고선지(高仙芝), 왕모중(王毛仲) 등이 그랬다.
고족유도 병이 들어 관사에서 죽었으므로 천수를 다했다고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일흔까지 살았으므로 어쨌든 오래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이렇게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적 능력도 뛰어났고, 운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처세술이 상당히 뛰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의 아들 이름이 ‘제신(帝臣)’, 즉 ‘황제의 신하’였던 것도 혹 그의 처세술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여하튼 처세술에 능했던 고족유나 능력이 뛰어나 주목을 받았던 천헌성 모두 타국 땅인 당에서 살아 남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고구려인이었다는 것은 싫든 좋든 평생 그들을 따라다녔을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다른 나라에 나가 있거나 국적을 바꾼 오늘날의 많은 한국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이 있는 곳이 어디이건, 국적이 어디이건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겉모습에든, 마음속에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