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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천축국(인도) 다녀온 신라의 승려




혜초


한자 : 慧超,

 
  • 저필자정병상(숙명여대 교수)
  • 생몰년생년 : 704년 (음) ~ 몰년 : 787년 (음)
  • 발행일2010년 5월 25일
  • 분류승려
 

혜초, 열린 마음으로 세계를 받아들인 구도자

 

“세계를 향해 마음을 연 구도자
달 밝은 밤에 고향 길 바라보니
뜬구름 너울너울 그곳으로 돌아가네
구름에 실어 편지라도 부치려는데
바람이 거세어 돌아보지도 않네”
지금부터 1300년 가까이 되는 먼 옛날에 저 멀리 인도와 중앙아시아 지방을 두루 여행하고 여행기를 남긴 혜초(慧超)의 시다. 고국 신라와 공부하던 당나라에서 멀리 떠나와 험난한 여정 속에서 고향을 생각하며 읊은 시다. 오늘 읽어도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감동이 온다.
온갖 교통수단이 발달하여 걷는 수고를 덜어주는 오늘날 우리는 너무도 편안하게 지구 곳곳을 여행할 수 있다. 그러나 혜초가 경험했던 여행은 고난의 길이었다. 7,8년이나 걸린 오랜 여정을 제 발로 걸어서 해결해야 했다. 그렇지만 미지의 세계로 향한 호기심,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따뜻한 마음과 진리를 찾는 뜨거운 열정은 모든 역경을 이겨내도록 만들었다. 신라인 혜초는 일찍이 세계를 무대로 머나먼 이국 땅 곳곳에 발자국을 남겨 자신의 뜻을 폈던 열린 행동인이었다.
그런데 이런 혜초의 세계여행을 알려준 것은 백 여 년 전에 발견된 두루마리 하나였다. 중국 문물과 서양 문물이 만나는 비단길의 길목에는 오아시스 도시 둔황(敦煌)이 있다. 이곳에 세운 막고굴(莫高窟)의 한 작은 석굴(제17동)에서 1900년 엄청난 양의 전적과 서화가 발견되었다. 이 자료들은 여러 탐험대에 의해 유럽으로 실려 갔는데, 이중에서 프랑스의 펠리오(Pelliot)가《왕오천축국전》을 찾아냈다. 앞뒤가 떨어져 나가서 227행이 남아 있는 세로 28.5cm 길이 358.6cm의 사본(寫本)이었다.

 

 밀교의 고승 혜초

 

혜초는 신라에서 태어나 당나라에서 활동한 고승이다. 신라는 8세기에 빛나는 불교문화를 이룩하였지만 혜초는 더 새로운 불교를 찾아 당나라에 유학하였다. 그리고 당시 큰 관심의 대상이던 밀교(密敎)를 공부하였다. 주술적인 진언과 같은 의례를 통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종교세계를 펼치는 것이 밀교다. 그래서 밀교의 본고장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났고, 이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왕오천축국전》이다. 중국에 유학한 신라의 구도승은 180명에 이르고, 이중에서 인도로 갔던 이는 15명이다. 이들 중 10명이 여행길에서 목숨을 잃었고, 중국이나 신라로 돌아온 사람은 5명뿐이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구법여행을 다녀온 혜초는 733년 밀교의 대가 금강지(金剛智) 삼장에게서 법을 전해 받고 경전을 번역하는 일에도 참가하였다. 그리고 780년에는 밀교의 성지인 중국 오대산에서 경전을 해설하였다. 그러나 이것 말고 더 이상 혜초의 생애를 알려주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남은 자료를 종합해 보면, 혜초는 700년경에 태어나 일찍이 중국에 건너가 720년부터 728년경 사이에 구법여행을 다녀오고, 이후 밀교 고승으로 활동하다가 780년 이후에 당나라에서 생을 마친 것으로 추정된다.

 

 왕오천축국전을 따라 가는 인도와 중앙아시아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5천축, 곧 인도에 다녀온 기록이라는 뜻이다. 혜초는 720년경에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떠나 광주에서 배를 타고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돌아보고 728년경에 다시 장안에 도착했다.
지금 남아 있는《왕오천축국전》은 인도 동북부에서 시작된다. 바이샬리와 석가모니의 열반지 쿠쉬나가라, 석가모니가 처음 설법한 곳인 바라나시 등 불교 유적지를 돌아보고 이어 중인도로 간다. 중인도에서 3개월이 걸려 남인도에 이르고, 남인도에서 다시 2개월이 걸려 서인도에 이른다. 서인도에서 3개월 만에 인더스강 상류의 펀잡 지방에 이르고, 다시 1개월 만에 파키스탄 지역인 탁실라를 지나 카슈미르지방에 들어간다.
카슈미르에서 한 달 만에 불교미술이 크게 발달했던 간다라에 이르고, 간다라에서 북쪽으로 우디야나 등을 지나고 서쪽으로 아프가니스탄 지역인 남파에 이른다. 여기서 계빈 등을 거쳐 바미얀에 이르고 다시 토하라에 간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1개월을 가서 페르시아에 이르고, 다시 아라비아 땅에도 이르렀다. 사마르칸드 등의 호국(胡國)과 돌궐 등에 대한 소식도 듣고, 토하라에서 와한을 거쳐 세계의 지붕 파미르에 이른다. 이제 중국 땅에 들어가 타클라마칸 사막과 천산산맥 사이로 난 서역북도를 따라 카슈가르와 쿠차를 지나고, 둔황을 눈앞에 둔 고창에서 기록은 끊어진다.

 

 구법여행으로 연 문화교류

 

이《왕오천축국전》은 자신이 여행한 지방에서 보고 느낀 점이나 전해들은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래서 각 지역의 불교계 현황과 지역 간의 거리를 비롯한 지리 환경, 풍습과 산물이나 언어 또는 정치 상황에 이르기까지를 종합적으로 보여주어 당시 상황을 폭넓게 이해하도록 해준다. 한편으로 순례자의 감회를 풍부한 시정으로 표현하여 서정적 여행기의 특성을 지닌 것으로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
혜초는 중국 남동부에서 해로로 출발하여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돌아 육로로 당나라에 돌아왔다. 인도여행으로 손꼽히는 현장(玄奘)은 7세기에 육로로 갔다가 육로로 돌아와 그 과정을 방대한 기록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로 남겼다.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 전반의 인도와 중앙아시아 사정을 알려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인도불교 8대 유적지의 명칭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아랍과 중앙아시아의 충돌을 생생하게 그렸으며, 아랍 문화와 최초로 교섭한 기록을 남기는 등 이 책만이 갖는 특징도 많다.
《왕오천축국전》은 앞과 뒤가 없고 각 나라의 풍정도 간단하게 기술하였다. 그래서 전반과 후반의 여행 일정을 복원하는 일에서부터 기록 자체의 성격과 해석을 위한 손길이 필요하다. 구법여행 이외의 활동상에 대한 추적도 살펴야 한다. 이런 노력들이 성과를 거두면, 일찍이 세계를 향해 따뜻한 감성을 품은 열린 마음으로 세계를 받아들였던 혜초의 열정과 《왕오천축국전》의 기록이 되살아나리라 기대된다.

왕오천축국전 순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