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당나라로 도망친 천남생 그는 누구인가?

천남생

한자 : 泉男生, 이명 : 淵男生,

 
  • 저필자김현숙(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생몰년생년 : 634년 (음) ~ 몰년 : 679년 (음)
  • 발행일2010년 3월 25일
  • 분류귀족
 

당나라 신하로 변신한 남생 부자의 최후

 

666년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이 지방 순시를 하는 동안 동생들인 남건 남산 형제가 쿠테타를 일으켰다. 평양으로 갈수 없게 된 남생 부자는 국내성으로 가려했으나 이조차 여의치 않게 되었다. 예상과 달리 국내성 지역의 귀족들이 그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남생의 아들 헌성이 또 다른 안을 내놓았다. 당으로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군대를 빌어 와 삼촌들을 치자는 것이다. 헌성이 먼저 당으로 들어갔고 다른 사람들도 따라 들어갔다. 마침내 668년 남생 일파는 당나라 군대의 향도가 되어 고국으로 쳐들어와 평양성을 공격했고, 고구려는 멸망했다.
이후 남생과 헌성은 당의 수도에서 당 황제의 신하로서 살아가게 되었다. 이들은 자진 귀화했고,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므로 당으로부터 고위관직을 받아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었다.
남생은 고구려 유민에 대한 지배에도 직접 참여했다. 나당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677년에 당에서는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왕에 봉한 뒤 요동으로 보내 지역민을 안무하게 했다. 고구려유민들의 저항이 워낙 강력하게 지속되어 지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괴뢰국을 세워준 후 보장왕을 통해 유민들을 통치하려 했던 것이다.
남생은 보장왕과 다른 경로로 고구려 옛 땅에 파견되었다. 그는 안동도호부의 관리로 파견되어 고구려유민 통치에 참여했다. 고구려유민에 대한 통치와 감시체계를 이중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보장왕은 당의 의도와 달리 요동으로 돌아가자마자 과거 고구려 민이었던 속말말갈(粟末靺鞨)과 짜고 고구려 복국(復國)을 도모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고, 보장왕은 다음 해에 귀양지에서 나라 잃은 부끄러운 왕으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자진 투항하고 얻은 부귀영화의 씁쓸함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남생 역시 보장왕과 마찬가지로 고구려 부흥을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나오지만, 역사서나 그의 묘지명, 그 아들과 손자의 묘지명 등에서는 그런 면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료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럼 그 아들인 헌성은 어떻게 되었을까? 당에 자진 투항함으로써 그나마 귀족의 신분을 유지하고 당에서 관직활동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대개 이민족 정벌을 위한 전쟁터에 계속 동원되었다. 역대 중국 왕조에서 많이 사용하는 수법 중에 하나가 이민족과 전쟁을 치를 때 이민족 출신 장군과 병사들을 선봉에 세우는 것이었다. 이이제이의 하나였다고도 할 수 있고, 한족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천헌성도 당에 대한 충성도와 군사적 능력 면에서 인정을 받아 황제의 최측근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래서 유명한 일화도 남겼다. 당을 통치하던 측천무후가 금폐(金幣)를 내리고 군신가운데 활 잘 쏘는 사람을 천거하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천헌성을 지목했다. 그러자 그는 무후에게 “폐하가 활 잘쏘는 사람을 고르라고 했는데 모두 화인(한족)이 아닙니다. 신은 당의 관리들이 활쏘기 때문에 수치스럽게 여길까 염려되오니 그것을 파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굴곡이 심했던 측천무후 집권기, 당의 정치판에서 달리 의지할 바 없는 유민으로서 매우 조심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측천무후의 공적을 새긴 거대한 구리기둥인 천추(天樞)를 조성할 때, 검교천추자래사(檢校天樞子來使)가 되어 구리 등 물자 조달을 책임졌지만 래준신(來俊臣)이라는 자의 금품 요구를 거절했다가 앙심을 품은 래준신이 헌성이 모반을 꾀했다고 모함을 해서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그의 나이 마흔 둘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변명만 가득한 연씨 일가의 묘지명

 

천헌성은 현은(玄隱), 현일(玄逸), 현정(玄靜)이라는 아들 셋을 두었다. 다른 아들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장남인 현은의 경우에는 그 자신의 묘지석(무덤주인의 약력이나 극랑왕생을 비는 글을 새겨 무덤안에 넣어둔 정방형의 돌)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아버지인 헌성의 묘지명(묘지석에 새겨진 글)과 22세에 요절한 그의 아들 천비(泉毖)의 묘지명에 이름이 나온다.
그런데 현은이 손수 지은 아들 천비의 묘지명에는 자기 아들의 출자를 ‘경조만년인(京兆萬年人)’이라고만 적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한 세대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였고, 아버지가 유명인사였으므로 천비가 고구려 출신이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다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은이 아들 비의 출자를 중국의 수도 출신이라고만 밝혀놓고, 고구려와의 관련성을 나타내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고구려에 대한 기억을 잃어서였을까? 나라를 배신한 고구려유민으로서 겪었을 많은 일들과 회한을 잊고자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점은 남생과 헌성의 ‘묘지명’에서도 찾을 수 있다. 둘의 묘지에는 그들이 당으로 갈 때의 상황을 상세하게 적어놓았다. 오판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다. 대신 그들을 배신한 남건과 남산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 놓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변명(?)하고 정당화하는 내용만 구구절절이 적어놓았다.
조국을 배신하고 떠난 이들의 무덤은 북망산에 있다. 최근 이들의 무덤이 확인되어 학계에 알려졌다. 중국 낙양시(洛陽市) 맹진현(孟津縣) 동산(東山) 영두촌(嶺頭村)에 천남생과 그 아들 천헌성, 천헌성의 손자인 천비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사진 참조) 동서방향으로 배열되어 있는 세 기(基)의 무덤 중 가운데 (전봇대가 서있는 곳) 봉분이 천남생의 무덤이고, 그 좌측에 천헌성, 우측에 천비가 묻혀있다. 남생은 요동에서 이곳까지 유해를 옮겨와 묻은 것이다. 이후 그 증손자까지 함께 묻힌 것을 보면 이 주변이 모두 남생 일가의 가족묘지였던 것 같다.

남생일가 무덤의 원경.
- 가운데가 남생묘, 좌측이 천헌성묘, 우측이 천비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