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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덕혜옹주의 삶

덕혜

한자 : 德惠, 이명 : 李德惠, 복령당 아기씨, 시호 : 德惠翁主

 
  • 저필자김은숙(한국교원대 교수)
  • 생몰년생년 : 1912년 5월 25일 ~ 몰년 : 1989년 4월 21일
  • 발행일2010년 10월 25일
  • 분류왕족, 황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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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조선의 비극을 완성한 덕혜의 삶

 

올해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지만, 우리나라 매스컴에서는 비교적 조용하게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 특기할 만한 것은 ‘덕혜옹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는 점이다. 일본의 여성사가 혼마 야스코씨가 1998년에 덕혜옹주의 삶을 복원한 평전을 일본에서 출판한 후, 우리나라에서 2008년에 번역서가 나왔다. 2009년에는 이를 바탕으로 쓴 소설《덕혜옹주》가 나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최근에는 혼마 야스코씨가 이 소설이 자신의 글을 도용하였다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었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복녕당 양귀인에게 낳은 외동딸로, 1912년 5월 25일 덕수궁에서 태어나 1989년 4월 21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78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짧지 않은 생을 살았지만, 덕혜옹주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알기는 매우 어렵다. 그녀는 19살 때부터 조발성 치매증에 시달렸고 20살부터 45살까지의 그녀의 삶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그녀의 남편 소 다케유키는 결혼서약에 비밀 준수 조항이 있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조선일보〉〈동아일보〉등의 기사나 마사코 비(한국명 이방자)의 회고록, 상궁이나 동창생들을 인터뷰한 내용 등으로 그녀의 생애를 복원하기는 매우 어려웠으므로, 덕혜옹주의 생애를 밝힌 본격적인 연구서는 없었다. 그런데 혼마 야스코씨가 단편적인 자료들을 세밀히 검토하는 한편 덕혜옹주의 남편 소 타케유키 관련 자료를 발굴하여 덕혜옹주의 일생을 복원해 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데에도 그녀의 책《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가 많은 참고가 되었음을 밝혀둔다.

 

 한국강제병합 100년의 해 덕혜에 대한 이례적인 관심

 

덕혜옹주는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이미 왕실은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일본은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하였고, 1910년 8월에는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여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순종황제를 이왕, 고종황제를 이태왕으로 격하시켜 일본 황족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회갑에 얻은 덕혜옹주를 고종은 끔찍이 귀여워하여, 1916년 덕수궁 안의 즉조당에 유치원을 만들어 5살된 덕혜옹주를 교육시켰고, 그 해 이은 황태자와 마사코의 약혼이 발표되자, 덕혜옹주의 사윗감을 측근에서 물색하였다.
그러나 덕혜옹주가 8살 때인 1919년 1월 21일 고종은 덕수궁 함녕전에서 사망하였다. 고종의 사후 곧 독살설이 떠돌았고, 3월 3일 고종의 국장일에 맞추어 전국적으로 3·1독립운동이 일어났다. 1920년 봄, 덕혜옹주는 양귀인과 함께 창덕궁 관물헌으로 옮겨 살게 되었는데, 조선총독부는 덕혜옹주의 상징성을 의식하여 그녀를 일본인으로 교육시키고자 하였다. 덕혜옹주는 1920년 관물헌에서 일본인 교사 두 명에게 교육을 받다가, 1921년 4월에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는 히노데 소학교에 편입하였는데, 그녀가 일본옷을 입고 일본인 학생 사이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일제는 8살 때 일본으로 유학 가서 일본여성과 결혼하였던 이은 황태자의 선례에 따라 덕혜옹주의 미래를 계획하였다. 14살 때인 1925년 4월 덕혜옹주가 일본 옷을 입고 경성 역을 떠나는 모습이 신문에 공개되었다. 덕혜옹주는 오빠 이은 황태자의 집에서 일본 화족들의 딸이 다니는 여자학습원에 다녔으나, 일본인 학생들과 어울리지 않고 고독한 학창생활을 보냈다.
1926년 4월 이은 공 부부와 함께 서울로 돌아갔으나,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한 후 6월 10일의 국장에는 참석을 허락받지 못하였다. 순종의 사후 황태자 이은 공이 뒤를 이어 이왕이 되었으나 즉위식은 없었다.

 

 고독 속에 스스로를 가두다

 

덕혜옹주는 1927년 순종의 1주기 때에도 1928년 순종의 2주기 때에도 계동의 사가에 살던 어머니 양귀인을 만날 수 없었다. 1929년 6월 5일 양귀인의 장례식에서도, 덕혜옹주는 상복을 입는 것도, 장례행렬에 참가하는 것도 금지 당하였을뿐만 아니라 이틀 후 일본으로 떠나야 했다. 그 사이에 덕혜옹주의 마음의 병은 깊어져, 1930년 가을부터는 불면증과 등교 거부가 계속되었다. 이때 조발성 치매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 사이 일본 정부는 대마도주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을 추진하였다. 1931년 3월 덕혜옹주가 여자학습원 본과를 졸업하고, 소 다케유키가 도쿄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그해 5월에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1932년 8월에 외동딸 마사에(정혜)가 태어났다.
덕혜옹주의 결혼 생활에 대해 우리나라에는 남편의 학대로 덕혜옹주가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다는 설이 오랫동안 있었다. 그러나 혼마 야스코씨는 소 다케유키의 후견인이었던 외할아버지의 노트와 언니의 인터뷰, 소 다케유키가 그린 마사에의 초상화 사진과 시집 등의 자료를 발굴하여 두 사람의 관계를 복원했다. 특히 소 다케유키의 시를 분석하여, 아내 덕혜옹주에 대한 연민, 원망, 체념, 한탄을 읽어냈다. 집안의 특별한 인연 때문에 소 다케유키 편들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아니면 영원히 어둠 속에 묻혀 있었을 부분에 빛을 던진 것은 분명하다.
덕혜옹주의 병세는 끝내 호전되지 않아, 소 다케유키는 1946년 가을에 덕혜옹주를 마츠자와 병원에 입원시켰고, 1955년 6월에는 25년간의 결혼 생활을 끝냈다. 그 해 가을 딸 소 마사에의 결혼 후 소 다케유키는 곧 재혼하였다. 다음해 8월 덕혜의 유일한 혈육인 딸 소 마사에가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자살로 추정되고 있다. 1962년 1월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배려로 덕혜옹주는 우리나라로 돌아와, 7년간의 병원요양 후 1968년 창덕궁 낙선재로 옮겨 살다가 1989년 사망하였다.
이것이 지금까지 밝혀진 덕혜옹주의 일생이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앞으로도 덕혜옹주는 우리들의 ‘기억의 장소’에서 계속 부활할 것이다.

1923년경 덕혜옹주


1968년 부터 1989년까지 덕혜옹주가 기거했던 창덕궁 낙선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