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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동북공정 바로알기 고조선의 뿌리


 

 고조선의 뿌리

 


 
 
알아볼까요
▶ 고조선은 기자조선→ 위만 조선→ 한사군 으로 이어지는 중국사다.

▶ 고조선은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를 이룩한 단군조선의 나라다.
 


중국학자 중 일부는 은(殷)의 왕족인 기자(箕子)가 고진국(古辰國)으로 이주해 고조선을 세웠고, 뒤에 주(周)로 가서 신하의 예를 표했으므로 고조선은 주의 제후국이었다고 주장한다. 기자조선이 위만조선으로 교체되며, 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4군(郡)을 설치했으므로 고조선사는 중국사라고 한다.


그러나 기자조선은 문헌사료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 중국측 주장의 근거인 『상서대전』은 한(漢) 때에 편찬된 사서로, 그 이전 중국사서에는 없던 기자에 관한 기록이 한 때에 들어 갑자기 나오게 된 것은 시대적 필요성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해 와서 나라를 세웠다면 물질적인 흔적을 남기게 된다. 하지만 요동지도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문화는 중국과 다른 고유한 성격을 띠고 있으며, 성격상으로도 단절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반면 은·주 때의 청동예기 등은 이 지역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비파형동검·미송리식 토기·고인돌 같은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한 것은 우리 역사서에 나오는 단군조선이다. 후에 연(燕)에서 온 위만이 정권을 탈취했는데 그것이 위만조선이다. 그런데 이 경우, 고조선의 일부 지배층만 교체되었을 뿐 국가의 정체성에는 변화가 없었다. 조선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우거왕(右渠王)한국민족문화대백과 때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역계경(歷谿卿)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니계상(尼谿相) 참(參) 등과 같이 조선인으로 보이는 인물들이 고위직에 상당수 포진하고 있었던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위만조선도 고조선에 포함되는 것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새로운 조선인 위만조선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단군왕검의 조선을 고조선이라 칭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훗날 이성계가 세운 나라가 조선인 것도 우리가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의미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 비파형 동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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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

 
실제 연대를 알 수 없었던 서주 공화 원년(西周 共和 元年, 기원전 841년)에서 그 이전 하(夏) 왕조 성립시기까지의 절대 연대를 확정지으려 한 중국의 국가 연구 프로젝트로 중국 고대 왕조의 시간 범위를 확장시키는 사업이다. 2000년 하상주단대공정의 성과보고를 통해 하(기원전 2070∼1600년), 상(기원전 1600∼1300년), 상 후기(기원전 1300∼1046년), 서주(기원전 1046∼771년)의 연대를 확정하여 중국이 주변 어느 국가와 민족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국가를 세우고 문명을 이룩하였음을 과시하였다. 이로써 민족적 자부심과 자신감을 고무하고 민족적 응집력을 제고하는 효과를 거두었다고 자평하였으나, 객관적이지 않고 치밀하지 못한 연구방법으로 인해 국내외에서 부정적인 평가가 폭넓게 제기되고 있다.

 
단대공정연표
왕조재위연도(기원전)
하(夏) 왕조 2070~1600년
상(商) 왕조전기1600~1300년
상(商) 왕조반경(盤庚)1300~?년
소신(小辛) 
소을(小乙)? ~1251년
무정(武丁)1250~1192년
조경(祖庚)119~?년
조갑(祖甲) 
름신(廩辛) 
강정(康丁)? ~1148년
무을(武乙)1147~1113년
문정(文丁)1112~1102년
제을(帝乙)1101~1076년
제신(帝辛)1075~1046년
서주(西周) 왕조무왕(武王)1046~1043년
성왕(成王)1042~1021년
강왕(康王)1020~996년
소왕(昭王)995~977년
목왕(穆王)976~923년
공왕(共王)922~900년
의왕(懿王)899~892년
효왕(孝王)891~886년
이왕(夷王)885~878년
여왕( 厲王)877~841년
공화(共和)841~828년
선왕(宣王)827~782년
유왕(幽王)781~7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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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

 
하상주단대공정의 연구성과를 계승하여 연구범위를 시·공간적으로 확대하려는 중국 고대사·고고학의 국가적 프로젝트다. 하상주단대공정에서 확정한 하 왕조시대보다 앞선 문헌에 서 전하는 이른바 ‘ 오제(五帝) ’시대 중국문명의 계보를 구축하려는 연구다(기원전 3500∼2000년). 고고학적 증거에 입각하여 하왕조 이전의 전설시대를 복원하여 중국의 오천년 문명사를 사실로써 입증하려는 것으로서, 황하 연변(黃河 沿邊)지도에 염제(炎帝)와 황제(黃帝) 관련 대형 유적공원을 정비하는 등 허구의 역사를 실재했던 ‘사실’인 양 보이려는 시도들이 각지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오제전설은 전국(戰國)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사실과는 분리되어 이해해야 할 신화에 속한다.

▶ 염제·황제상의 대형 유적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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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하문명론(遼河文明論)

 
‘요하문명론’은 요하지역에서 일어난 고대 문명과 문화의 발전에 관한 논의다. 그 첫머리를 장식하는 홍산문화(紅山文化)는 일종의 신석기문화이나, 돌로 쌓은 대형 무덤과 ‘여신묘(女神廟)’로 불리는 신전 건축 등을 상당수 남겨놓은 비교적 발달한 문화를 보유하였다. 중국학계는 이를 근거로 이 시기에 이미 발달한 권력과 계층화된 사회를 가진 ‘문명’이 등장하였다고 본다. 또한 이 문화가 황하 유역의 앙소(仰韶)문화 등과 교류하면서 ‘중국문명’의 원형을 창조했다고 주장하면서 이 문화가 중국인이 공통의 조상으로 모시는 황제(黃帝) 부족이 창조한 문명이라고 본다. 요하 유역의 홍산문화에서 추정되는 발달한 문화적 요소에 입각해서 중국 최초의 문명이 황하가 아닌 요하 유역에서 성립되었음을 입증하려고 하는 이 시도는 ‘문명’ 개념의 무리한 적용으로 논란의 여지가 많다.
▲ 홍산문화-옥룡
▲ 홍산문화-옥저룡
▲ 돌로 쌓은 홍산문화 유적
▲ 홍산문화 - 여신묘
▲ 홍산문화 - 여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