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정계비의 위치
- 알아볼까요
- ▶ 백두산정계비는 원래 소백산에 있었다.▶ 백두산정계비는 세워질 때부터 1931년까지 백두산 기슭에 있었다.
중국에서는
를 소백산에서 백두산으로 옮겼다는 ‘정계비 이동설’을 주장하여 국경문제에 새로운 파문을 던지고 있다. ‘정계비 이동설’에 따르면 당시의 기록과 지형, 경계 표지 등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두만강이 시작하는 지류는 홍단수(紅丹水)고 백두산정계비의 원래 위치는 소백산 정상이다. 정계비 건립 직후 조선측 관리들이 정계비를 백두산 남쪽 기슭으로 옮기고 정계비와 토문강 사이에 목책·돌무더기·흙무더기 같은 경계 표지를 설치하여 경계를 조작하였다고 한다. 19세기 이래 국경회담에서 백두산정계비를 기준으로 경계를 정했음을 생각할 때, 이 논리대로라면 백두산에서 남쪽으로 20km가량 내려온 소백산이 정확한 국경이 되는 셈이다.
‘정계비 이동설’은 이미 일·청 간의 간도문제 교섭 당시부터 제기되었던 문제인데, 최근에는 이를 더욱 정교화하여 4차례에 걸친 위치 이동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의 기록이나 고지도를 살펴보면 ‘정계비 이동설’이 허구라는 점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백두산정계비 건립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기록이나 백두산정계비 건립 이후 백두산에 오르면서 백두산정계비를 보았던 사람들의 기록에서 백두산정계비의 위치는 대체로 일치한다.
- 이 지도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직후 청의 관리 목극등(穆克登)이 수행원에게 백두산 및 압록강, 두만간의 지류를 그리게 하고 이를 모사하여 조선의 관리 박권(朴權)에게 건네준 것이다. 백두산 기슭에 세워진 정계비가 강원비(江原碑)로 표기되어 있으며, 소백산은 정계비 서남쪽에 대각봉, 연지봉과 나란히 별도의 봉우리로 표기되어 있다.
당시 사람들은 백두산에 오르기 위하여 삼지연, 소백산, 연지봉을 거쳤으며, 연지봉을 지나 백두산에 오르는 도중에 백두산정계비를 보았다. 또한 백두산정계비 건립 당시에 그린 『백두산정계비도』와 이후 백두산 일대를 그린 각종 고지도를 살펴보아도 백두산정계비의 위치는 대체로 동일하다. 고지도에는 백두산과 연지봉 사이에 백두산정계비가 그려져 있고 그 옆에 분수령이라고 적혀 있다.
- 개요도는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1927)에 첨부된 것인데, 붉은 실선은 최남선 일행의 이동경로를 표시한 것이다. 두만강 상류의 물줄기를 상류에서부터 보자면 홍토수(紅土水), 석을수(石乙水), 홍단수(紅丹水, 개요도에서는 ‘紅湍水’로 표기되어 있음), 서두수(西頭水) 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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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화
‘장백산문화’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연구성과가 축적되면서 ‘장백산문화’의 내용이 체계화되었다. ‘장백산문화’는 ‘장백산지역에서 숙신족계와 예맥족계 문화를 기초로 하고 중화문화를 주체로 해서 여러 민족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지역문화’라고 정의되고, ‘장백산문화’의 특징으로 ‘①농경, 어렵, 유목이 결합된 물질문화 ②군정합일, 상무숭실의 정치문화 ③질박하고 자연스러우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한 민속문화 ④애니미즘, 다신숭배의 샤머니즘문화’ 등이 제시되었다. 또한 백두산지역의 구석기문화와 요하유역의 신석기문화를 ‘장백산문화’의 기원으로 삼음으로써 ‘장백산문화’의 유구함을 부각시키고, 만주족 계통의 문화를 중요시하면서도 다민족 문화의 융합에서 중화문화의 주도적 지위를 강조하였다.
‘장백산문화’는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거주하였던 다양한 민족들의 문화적 요소들을 ‘장백산문화’ 속에 포괄시키고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을 적용하여 ‘장백산문화’를 중화문화의 기원이자 주요 구성부분으로 만듦으로써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동북을 진흥시키려면 동북인을 깨워라’라는 슬로건처럼 ‘장백산문화’는 중국 동북지역 사람들을 경제개발의 주체로 변화시키는 동시에 관광산업과 문화산업의 풍부한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