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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민족대표 33명의 수장 손병희

손병희

한자 : 孫秉熙, 이명 : 應九, 李祥憲, 호 : 義菴,

 
  • 저필자조규태(한성대 교수)
  • 생몰년생년 : 1861년 4월 8일 ~ 몰년 : 1922년 5월 19일
  • 발행일2013년 2월 25일
  • 분류종교인, 독립운동가
 

3·1운동을 주도한 손병희의 꿈과 민족운동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1861~1922)는 동학과 천도교의 지도자이자 근대의 대표적 민족운동가이다. 동학의 3세 교주로 그는 1905년 동학의 명칭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천도교를 일제강점기 300만 명의 교단으로 발전시켰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중군(中軍) 통령(統領)으로 제2차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그는 1919년에는 천도교의 대표 겸 민족대표로서 거족적 민족운동인 3ㆍ1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우리나라 근대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꼭 살펴보아야 할 인물이다.

 

 소년 손병희, 남다른 의로움을 지니다

 

손병희는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주군 대주리(현재 충북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서 아전인 두흥(斗興)과 첩인 경주 최씨 사이에서 서얼로 출생하였다. 적서차별(嫡庶差別)을 하던 당시의 제도와 관습에 불만을 가졌던 그는 아버지에게 “왜 적서차별을 하느냐”고 아버지에게 따졌고, 입신양명의 희망이 없자 기초적인 한문만 배우고 과거를 위한 책을 집어던졌다. 불만을 풀길 없어 술을 마시고, 도박장에 출입하고, 낭인단을 만들어 두목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다만, 그의 의로움만은 남달랐다. 12살 때 아버지 심부름으로 관가에 공금을 전달하러 가다가 길가에서 아사(餓死) 직전의 사람을 만나자, 그를 주막에 데려가 공금으로 밥을 사 먹여 목숨을 구해 주었다. 또, 공금 1,000냥을 횡령하여 머지않아 사형을 당하게 된 친구의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친구를 도와 자신의 집에서 1,000냥을 훔쳐가게 하였다. 그리고 17살 때 충청북도 괴산 삼거리를 지나다가 수신사(修信使)가 역졸의 머리털을 말꼬리에 묶고 오는 것을 보고, 그는 낫으로 말꼬리를 자르고 마부를 후려갈긴 후 수신사에게 사람을 이처럼 천대하느냐 항의하고 서류통을 못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의 도호(道號)가 의암(義菴)인것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었다.

 

 동학에 입교하여 동학교단을 이끌다

 

손병희는 1882년 사인여천(事人如天)의 평등사상과 보국안민·광제창생 등의 애민·애족사상에 매료되어 1882년 적출(嫡出) 장형 손병권의 아들 손천민을 통하여 동학에 입교하였다. 입교 후 손병희는 수도, 교리공부, 포교활동에 전력하여 1893년 초 충의대접주로 성장하였고, 복합상소 즈음 김연국·손천민과 함께 동학교단의 총지휘자에 선정되었다. 1894년 9월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를 최시형에게 건의한 손병희는 동학농민군의 중군 통령으로 북접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공주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퇴하였다. 이후 손병희는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전라도와 충청도, 강원도 등지로 도망을 다녀야 하였다. 동학농민운동 후인 1895년 무렵부터 손병희는 지역차별을 받던 평안도, 함경도 등 서북지역의 사람들에게 동학을 전파하였다. 서북 지역 교인의 힘을 토대로 1900년 교권을 장악한 손병희는 선진문물을 시찰하기 위하여190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일본에서 전 군부대신 조희연과 권동진·오세창·박영효·양한묵 등과 교유하면서 국제사정을 파악하고, 문명개화사상을 수용하였다. 그는 1902년 24명의 동학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켜 문명개화사상을 수용케 하였고, 교인들의 사상적 전환을 위해 1903년 〈삼전론(三戰論)〉과 〈명리전(明理傳)〉을 발표하였다.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생하자 일본이 이길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진보회(進步會)를 설립하고 친일적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05년 12월 1일 그는 동학이란 명칭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꾸고 교인들로 하여금 정치 활동을 지양하고 종교 활동에 전념케하였다. 동학에서 천도교로의 변경은 단지 명칭만의 변화가 아닌 패러다임의 변화였다. 교인들로 하여금 ‘배우는 무리(學徒)’라는 겸손한 태도에서 벗어나 ‘가르치는 사람(교인)’이란 우월적 자세를 지니도록 하고, 동양의 전통사상을 고수하는 데에서 탈피하여 서양의 근대사상도 수용하게 하였다. 손병희는 1906년 2월 천도교대헌을 반포하고 중앙총부와 지방조직을 근대적으로 정비하고, 교리를 수정하였다. 그리고 《만세보(萬歲報)》 등 근대적 신문을 발간하고, 교리강습소를 설립하여 문명개화사상과 서양의 근대사상을 전파함으로써 우리나라를 문명국, 자유국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런데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자 손병희는 포교를 통하여 교세를 신장하고, 교육을 통하여 천도교와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진력하였다.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일시 일본의 힘을 빌리려고 하였으나, 손병희는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서 조선의 독립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한국이 독립되면, 중국의 감정이 풀어져 장래 동양평화에 유리하고,동양평화가 정착되어 삼국이 단합하여 서양세력에 맞서면 일본단독으로 대항하는 것보다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더 나아가 세계가 하나가 되어 ‘침략’ 자체를 없애버리면 각 민족이 서로 친해져 행복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민족대표 33명의 수장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다

 

마침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1919년 1월 손병희는 조선도 새로운 국제질서에 따라 독립이될 수 있다고 예상하였다. 그는 국제정세에 밝은 천도교의 권동진·오세창·최린을 자택으로 불러 독립운동을 추진케 하였다. 처음에는 조선총독부에 독립을 청원하려다가,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는 쪽으로 방향을 변경하였다.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을 독립운동의 세 가지 원칙으로 정한 그는 우리 민족대중이 참여하고, 의견과 행동을 일치시켜, 비폭력의 방식으로 시위운동이 전개되기를 희망하였다. 손병희는 이 일의 실행을 최린·권동진·오세창에게 담당하게 하였다. 세 사람의 노력으로 천도교, 기독교, 불교 세 세력의 연합으로 독립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정되자, 손병희는 민족대표 33인의 수장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고,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개최하였다. 그리고 천도교인들로 하여금 각지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도록 지시하였다. 독립선언식 직후 체포되었지만, 손병희는 독립 후 한국의 정체로 민주공화제를 희망하였다. 즉, 그는 왕조주의 대신에 국민 대중에 의하여 선출된 지도자가 다스리는 정치를 구상하였던 것이다.

 

 천도교단 문화운동 추진의 구심적 역할을 하다

 

3ㆍ1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인 1919년 9월 천도교단에서 문화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자 옥중에 있던 그는 이에 뜻을 함께 하였다. 병으로 가출옥하여 1922년 사망하기까지 그는 천도교의 교주로 천도교단에서 청년운동·소년운동·여성운동·농민운동 등의 문화운동이 추진되는 데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손병희는 동양 문화를 지키고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하여 1894년 이른 바 반일적·반봉건적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10년 뒤인 1904년 그는 갑자기 친일적 문명개화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서구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의 노선 변경은 그것이 교단과 민족을 위한 길이라는 믿음 때문이었겠지만, 수많은 동지들의 죽음과 그들의 원한을 생각할 때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 결정으로 동학은 현도(顯道)하여 포교의 자유를얻고 일제강점기 대단한 교세를 과시하였다. 또한 이것을 배경으로 3·1운동과 문화운동, 6·10 만세운동과 같이 우리의 민족운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현재의 국제적인 정세를 고려할 때, 그의 선택은 역사의 흐름에 맞는 올바른 결정이었다. 그렇지만 동학과 천도교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결정은 동양문화와 자주를 강조하는 천도교의 원래의 정신을 약화시켜 정체성의 상실을 가져온 측면이 없지 않다. 바로 이 점이 불교·원불교·대순진리교가 성세인 데 비하여, 천도교가 약세를 보이는 한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손병희, 그는 동학·천도교와 우리 역사의 위인인가, 아니면 변절자인가? 3·1운동 94주년을 맞이하여 100여 년 전후 시기에 고뇌하는 손병희의 모습이 떠오른다

충북 청원군 생가 앞에 위치한 손병희 동상
충북 청원군에 위치한 손병희 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