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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백제의 왕 근초고왕

근초고왕

한자 : 近肖古王, 이명 : 照古王, 肖古王, 餘句,

 
  • 저필자김기섭(한성백제박물관 전시기획팀장)
  • 생몰년 ~ 몰년 : 375년 (음)
  • 발행일2011년 1월 25일
  • 분류
 

통합의 리더, 근초고왕

 

요즘 백제 근초고왕이 화제이다. KBS-TV 주말드라마 ‘근초고왕’때문이다. 주인공 부여구(扶餘句)가 갖가지 어려움을 뚫고 왕위에 오른 뒤 사방으로 영토를 넓혀 그야말로 대백제(大百濟)의 대왕으로 우뚝 서는 과정을 50부작으로 그린다는 것인데, 벌써 절반 가까이 방영됐다.
드라마를 본 사람들이 종종 물어온다. 왕후 부여화와 위홍란의 암투가 어떻게 전개되느냐고. 난들 알겠는가? 역사 기록에는 한 줄도 나오지 않는 가상의 인물들 사랑싸움 이야기를... 그저 드라마 작가들이 친 허구의 그물망 속에서 함께 허우적거리며 스토리텔링의 위력을 실감할 뿐이다.
사실 근초고왕(346~375)에 관한 기록은 한줌에 불과하다.《 삼국사기》에 실린 근초고왕 기사는 모두 24줄, 2쪽 반 분량이다. 1줄에 빈칸 없이 열여덟 글자를 가득 적은 곳도 있지만, 고작 4자(字)만 적고 나머지는 빈칸으로 남겨놓은 줄도 있다. 그리하여 근초고왕이라는 이름까지 모든 글자를 합해도 554자에 불과하다.
《삼국사기》에는 근초고왕이 즉위한 뒤 20년 동안의 기록이 전혀 없다. 단지 서기 346년 9월에 왕위에 오르고 이듬해 정월에 하늘과 땅의 신들에게 제사지낸 뒤 처가 쪽 친척인 진정(眞淨)을 지금의 법무장관에 해당하는 조정좌평(朝廷佐平)에 임명했다는 기사만 용케 남았을 뿐이다. 짧지만 본격적인 기록은 재위 21년째인 서기 366년부터 시작된다. 신라에 사신과 좋은 말을 보내고 바다 건너 동진(東晋)에 조공하는 등 이웃나라와의 우호에 힘쓰는 한편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 북쪽의 숙적 고구려에 맞섰다는 내용이다.

 

 한 줌에 불과한 근초고왕에 관한 기록

 

서기 369년, 고구려왕 사유(斯由) 곧 고국원왕이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태자근구수를 보내 맞서 싸워서 5천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371년에는 태자와 함께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까지 쳐들어가서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고 한다. 이듬해인 372년, 근초고왕은 당시 동북아시아의 중심이던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 영 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라는 작호를 받았다.
사람들은 근초고왕을 고구려를 군사적으로 압도하며 백제 영토를 크게 넓힌 왕으로만 기억한다. 큰 오해이다. 그는 단순히 군대만 잘 조련한 왕이 아니다. 다양한 사람, 다양한 문화를 한데 묶어 정치외교로, 사회경제로, 기술로, 행정시스템으로 꽃을 피워낸 왕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차가운 ‘카리스마의 군주’가 아니라 노련한 ‘통합의 군주’라고 부른다.
근초고왕이 즉위하던 4세기 중엽, 백제 땅은 지금의 서울∙경기지역이었고, 수도는 지금의 서울 송파구 일대였다. 평야가 많고 땅이 기름져 농사짓기에 알맞으며 강과 바다를 끼고 있어 물산이 풍부하고 기술∙문화가 발달한 곳이므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북쪽 만주지역의 부여(夫餘)에서 내려온 예족(濊族), 압록강유역의 고구려에서 내려온 맥족(貊族), 대대로 한강유역에서 터 잡고 살아온 한족(韓族) 등이 주민의 다수를 차지했다. 그리고 동해안의 옥저(沃沮)∙동예(東濊)지역에서 살다가 더 안전하고 풍요로운 백제로 귀순한 사람들, 대동강유역의 낙랑군(樂浪郡)과 황해도의 대방군(帶方郡)에서 살다가 땅이 고구려에 흡수되자 남쪽으로 피난 온 중국계 백제인, 백제의 고급문화와 선진기술을 배우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왜(倭)계 백제인도 적지 않았다. 백제는 출신지역이 서로 다르고 말과 문화 배경이 서로 다른 70여 만 명이 모여 사는 다문화(多文化)사회였던 것이다.
자칫 모래알처럼 흩어질 수 있는 사람들을 근초고왕은 하나로 묶어냈다. 우선 낙랑∙대방출신 인재들을 등용해서 기술∙문예 발전을 이끌어 국가 역량을 높이고 동진(중국)∙왜국(일본)과의 외교에 적극 활용하였다. 역사 기록을 주도한 박사 고흥(高興), 왜로 건너가 학계∙사상계를 이끈 왕인(王仁)박사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근초고왕이 중국의 정통왕조 동진으로부터 받은 ‘낙랑태수’는 비록 이름뿐인 벼슬이었지만, 중국계 주민들의 환심을 사서 오직 칼의 힘만 믿고 낙랑∙대방지역을 질풍처럼 내달리던 고구려에 대항케 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다민족 다문화를 백제의 개성으로 승화시키다

 

이웃나라 가야∙신라와 우호를 다져 분쟁을 피함으로써 삼한(三韓)계통 주민들의 물리적, 정신적 고통을 없애고 바다 건너 왜로 향하는 길을 안전하게 만들었다. 왜왕에게는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어 보내고 학자∙기술자를 파견하는 등 선진문물을 전해주며 우호를 다졌다. 이후 왜국은 백제가 요청하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군사를 파견하는 맹방이 되었다.
그리하여 4세기 후반 백제와 고구려가 한창 치열하게 전쟁하던 무렵, 국제정세는 남방 국가연합과 북방 국가연합이 대립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백제-동진-가야-신라-왜국 연합 vs 고구려-전연 연합 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고구려와 달리 백제 근초고왕은 어떻게 주변의 많은 나라들을 한데 묶어낼 수 있었을까?
백제는 지리적 특징 때문에 해양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중국이 남북조로 나뉘어 대립했으므로 서해를 관통해 산둥 반도나 양자강유역에 닿는 항로를 개발해야 했으며, 연안항로를 통해 한반도 서북부 및 요동∙요서지역과 교통하고, 서해안-남해안-일본열도를 잇는 해상교통로를 관리했다. 이러한 지리적 특징, 주어진 조건을 가장 잘 살린 사람이 근초고왕이다. 그는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나라들과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백제 사회∙문화의 개방성을 더욱 북돋았다. 개방성은 백제 주민의 종족적 다양성과 어우러져 사회의 다문화 성향을 짙게 하였다. 근초고왕 시절의 왕도(王都)였던 풍납토성이 한강변에 위치하고, 그 안팎에서 낙랑계통, 고구려계통, 중국 북조계통, 중국 남조계통, 가야∙신라계통, 마한계통, 왜국계통 등 문화계통이 다양하고 수준도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백제문화의 특징이랄 수 있는 해양성, 개방성, 다양성을 뚜렷하게 드러낸 인물. 조상이 서로 다르고 문화전통이 다른 사람들, 모여든 사연이 서로 다르고 목적이 다른 사람들, 언제든 바다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던 사람들을 백제라는 하나의 깃발 아래 모아 고구려와 싸워 이기게 하고 백제 영토를 최대 크기로 넓힌 인물. 근초고왕! 그래서 나는 그를 ‘통합의 리더’라고 부른다.

《삼국사기》‘백제본기’의 근초고왕 기록(일부)
근초고왕 때의 백제 영토
칠지도 앞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