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
한자 : 李會榮, 호 : 友堂,
- 저필자이명화(독립기념관 연구위원)
- 생몰년생년 : 1867년 3월 17일(음) ~ 몰년 : 1932년 11월 17일
- 발행일2012년 7월 25일
- 분류교육자, 독립운동가
부조리한 시대에 미래의 비전을 꿈꾼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식민지 기억 속의 이회영
한국근대사상에서 이회영은 독립운동가라기보다는 혁명가라고 불리우는 것이 적절하다. 그는 조국 독립을 쟁취하는 데에서 나아가 모든 인류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 신념에 따라 일신을 온전히 투신했기 때문이다.
이회영은 1876년 4월 2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3달 전, 일본은 군함 6척을 이끌고 무력시위를 하며 조선정부를 압박해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하였다. 그리고 조선은 일본에 의해 개항되었다. 조선은 중국 중심의 화이체제에서 벗어났지만 일본은 조선을 완전히 장악해 그들의 대륙침략 교두보로 삼고자 하였다. 자기 울타리에 갇힌 조선의 위정자들은 시대의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고 소중화(小中華) 세계에 안주하며 세상의 변화를 외면하였다. 그러나 이회영은 “자신을 돌보지 않으며 오직 나라를 위하여 도모하며 일을 당해서는 과감히 실행하고 환난을 헤아리지 않는다”는 조선 전통의 선비정신으로 사직을 지키고자 하였다.
1896년, 우당의 나이 20세일 때, 조선의 왕궁을 침입해 들어온 일본인들이 휘두른 칼날에 국모가 살해되고 국왕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 가는 곤궁한 처지에 몰려있었다. 봉건주의의 허물을 벗지 못한 채 뒤늦게 근대화의 씨앗이 싹트고 있을 때, 이회영은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개화독립사상과 민주주의, 민권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무렵 이회영은 대한제국의 국민이 독립적이며 자유로운 인간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국권을 지켜야한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되었다.
만주와 연해주, 그리고 태평양으로 나가는 요충지에 자리한 한반도. 일본이 한반도에 독점적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한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이를 적극 추진하였다. 일본은 서구열강을 향해 일찍이 ‘탈아(脫亞)’를 주창하면서 자신을 서양의 제국주의 반열에 올려놓고 동아시아 침략을 구체화하였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 인정받으면서 동아시아평화를 내세워 아시아에 패권을 차지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식민지 구도를 완성시켜 가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중립국화는 좌절되었고, 러일전쟁을 불사한 일본이 포츠머스 조약에서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집권권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제 일본은 더 이상 동양평화를 지키고 그 안에 조선의 독립을 지원한다는 기만적인 치장이 필요 없게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이회영은 상동청년회의 애국청년들과 을사늑약 파기운동을 전개하고 을사5적을 처단해 세상에 경종을 울려 일제의 한국 침략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동양평화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일본의 위협을 받으며 황궁에 갇혀 꼼작할 수 없었던 황제를 대신하여 막후에서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비밀 특사를 파견하여 전세계 열강들에게 한국침략의 부당성을 호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광무황제는 강제 폐위당하고 한국 군대는 해산되어버렸다. 명분상의 한국 독립의 상징적 장치는 모두 제거된 셈이다. 일제는 ‘한일합방’이라는 슬로건마저도 걷어내 버리고 이른바 ‘한국병합’을 통한 한국 식민지화를 실현시켰다.
이회영은 1907년 신민회 결성에 참여하여 무너져가는 국가를 지키기 위해 다방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국권을 지키고자 했지만, 일본의 대륙침략 야욕 앞에서 한국의 독립은 초라한 외침에 불과했다.
새로운 공동체의 건설과 무장투쟁으로의 길
이회영과 다섯 형제의 가솔들은 일제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 기지를 개척하여 장기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여 나라의 독립을 되찾고자 하였다. 전 재산을 팔아 엄동설한 살을 에는 듯한 북풍한설을 맞으며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 정착하였다. 일찍이 답사해 둔 이곳에서 경학사를 만들고 새로운 한민족 공동체를 출범시켰다.
“아아! 사랑할 것은 한국이요. 슬픈 것은 한민족이구나. 피어린 역사 4천년 동안 예의와 제도를 모두 갖추었고 기름진 땅 3천리에는 동식물과 광산물이 풍부하였다…그런데 어쩌다 백년의 취한 잠이 깊었던지 서양의 팽창한 때를 만나서 대포와 탄환이 날마다 서까래를 쳐부숴도 이를 못 듣고, 철함과 전차가 문밖에 서로 달려도 못본 체하다가 끝내 갑자기 맹호가 이빨을 위에서 갈고 굶주린 독수리가 아래에서 할퀴게 되었구나…”(경학사 취지서 중에서)
국망(國亡)에 이르게 되었음을 통렬하게 반성한 후 신흥강습소(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를 세워 피 끓는 젊은이들에게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대비한 사관교육을 시작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우당과 건영·석영·철영·시영·호영 등 여섯 형제들이 전 재산을 처분하여 마련한 독립자금으로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우리 옛 조상의 땅인 만주에서 공동체를 이룩하고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하여 국권을 되찾고자 했다. 그러나 우선 재만한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그들을 삶의 터전에 평화롭게 안착시키는 것이 과제였다. 성공적인 독립운동 기지로 만들고자 전력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일동맹 관계가 수립되어 독립운동 여건은 나날히 악화되어갔다. 극한 상황에서도 독립운동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여러 가지 방도를 추구한 이회영은 민족적 영향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폐위된 광무황제를 만주로 망명시켜 그를 옹립, 망명정부를 세울 계획을 세우고 민족적 통일을 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광무황제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진 3·1독립운동의 소식은 이회영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었다.
3·1운동 후 국내에서는 신흥무관학교의 명성을 듣고 많은 젊은이들이 찾아와 독립군 사관교육을 받았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자들은 서로군정서·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 조선혁명군, 의열단·한국광복군 등 중국 관내와 만주에서 활약한 무장투쟁의 주역이 되었다. 이들의 강인한 독립정신은 그 어떤 시련에서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민족정신으로 승화되었으며 한국 항일무장독립투쟁사의 원류가 되었다.
자유연합에서 미래를 본 이회영
3·1독립운동 후 국외에서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일어나자, 이회영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파별에 휩싸이자 크게 낙담하고 정부 조직에 참여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으로 수립된 소비에트 연방의 등장과 이들에 의해 주도된 코민테른의 등장을 전체주의의 또 다른 이면으로 받아들인 이회영은 ‘신사상’으로 각광으로 받았던 공산주의사상에 거부감을 느꼈다.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이주한 이회영은 이제까지의 독립운동의 방략과 노선에 관해 전반적으로 재점검 하였다. 유교적 사상에 뿌리내리고 있었던 이회영은 베이징에서 아나키즘을 만나게 되었다. 이회영에게 아나키즘은 그 어떤 부조리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새로운 복음이었다. 민중을 해방시키고 제국주의의 권력체를 타도하고 그 어떤 억압도 받지 않고 그 어떤 억압도 강요하지 않는 자유연합에 의한, 절대적 자유를 향해 나가는 혁명의 길이야말로 이회영이 꿈꾸던 길이었기에 그는 아나키즘을 커다란 저항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회영이 아나키즘에 경도된 요인은 부조리한 시대를 향한 강렬한 저항심과 자신의 신념 안에 존재한 자유사상을 동시에 자극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회영은 특히 평등과 노동자 해방을 내세우며, 독재와 권력체인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자유 의지에 의한 자유연합주의에 입각한 상호부조의 세상 도래를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의 실현을 방해하는 폭력적 권력덩어리인 일제와의 타협없는 투쟁과 혁명의 길을 택하였다.
베이징에서 이회영의 집은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곳이었다. 누구나가 거쳐가고 머물러야 했던 이회영의 사랑방에는 단재 신채호와 심산 김창숙 등이 숙식을 함께하였고 민족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아나키스트들, 의열투쟁을 전개하는 인물들이 베이징에 올 때는 의례히 그의 집에 들러 민족의 장래에 대해 밤이 깊어가도록 토론하고 함께 공감하였다.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혁명가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았으며,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탈환』을 발간하여 많은 젊은이들에게 조국 독립과 독립국가 건설의 영감을 주었다.
마지막 순국처와 동아시아사상의 의미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한·중 민중간에 갈등을 이용해 중국동북(만주)를 완전 장악하고자 한 일본의 의중을 꿰뚫은 이회영은 이를 저지해 만주를 지키고 독립운동의 거점을 다시 구축하고자 만주행을 결행하였다. 그러나 정보를 입수한 일본은 1932년 11월 따렌항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리는 이회영을 체포, 여순감옥으로 송치하였다. 이회영은 일본경찰의 심문을 당하다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11월 17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회영 가문은 지배계층인 양반으로서의 책임감과 도의를 실천하며 개인의 부귀와 가문의 영달에 연연하지 않고 겨레와 조국에 투신하는 의연한 역사의 길을 선택했지만, 그 길은 너무도 참담하였다. 후일 조국이 광복되었을 때 여섯 형제 중 고국 땅을 밟은 이는 다섯째인 이시영 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국이 해방을 맞이한 지 어언 67년이 지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인들 뇌리에서 식민지시대는 지워지지 않고 있다. 오늘도 여전히 일본과는 교과서역사왜곡문제, 중국과는 동북공정문제를 둘러싸고 역사갈등을 겪고 있는 중이다. 역사로 인한 깊은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21세기 동아시아 세계는 역사 화해와 협력이 요구되고 있다. 한중일 국민간에 갈등을 치유하고 공통의 역사인식을 갖기 위해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면 그는 이회영이다. 그가 만들고자 한 세상은 그 누구도 억압하지 않는 세상, 그 누구도 억압당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부조리한 과거가 있다면 묻어버리지 말고 무엇이 모순이고 거짓이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동아시아 사회는 폭력, 착취, 그리고 충돌, 경쟁과 독재, 전체주의에 다름아닌 패권주의를 과거의 유산으로 기억하고 ‘평화’와 ‘정의’로 위장되었던 부조리 시대에 역사적 진실에 다가가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공유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이제 동아시아 공동체는 분파와 갈등과 대립을 넘어서 개인의 자유 의지가 존중받고 평화와 화해와 상호부조 및 조화로운 세상을 꿈꾼 이회영의 길을 기억해야 한다.
중국인 복장을 한 이회영 선생
베이징에서의 이회영(앞줄 오른쪽)
옥수수밭 넘어 신흥무관학교 옛훈련장 자리
- 중국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 고산자
- 중국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 고산자
이회영이 체포당한 따렌 수상경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