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
한자 : 申叔舟, 이명 : 泛翁, 호 : 希賢堂, 保閑齋, 시호 : 保閑齋
- 저필자손승철(강원대 교수)
- 생몰년생년 : 1417년 6월 20일(음) ~ 몰년 : 1475년 6월 21일(음)
- 발행일2011년 4월 25일
- 분류문신, 관리
신숙주, 사대교린 외교 시스템의 완성자
동아시아 해역의 약탈자 왜구
14세기 중엽, 동아시아 해역에 왜구가 창궐하던 시기에 동아시아 삼국의 국내∙외 정세는 복잡다단했다. 중국대륙은 원∙명 교체기였고, 한반도는 고려의 중흥방법을 놓고 친원파와 신흥사대부 세력 간의 갈등으로 매우 혼미했으며, 일본도 남북조시대의 혼란기로 천황이 두 명이나 존재하던 시기였다. 이 같은 혼란기를 틈타, 일본 구주지역과 대마도 등 소위 삼도(三島)의 일본인이 왜구가 되어 한반도와 중국 연해지역을 습격하여 해적질을 하면서 동아시아 해역세계는 급기야 약탈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왜구는 적을 때는 몇 척, 많은 때는 5백 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구성하여 500회 이상 한반도를 침범했다. 왜구는 남해와 서해의 연해지역은 물론 내륙 깊숙한 곳까지 약탈을 했다. 낙동강과 섬진강의 곡창지대, 농산물의 집산지였던 조창(漕倉)을 습격했고, 소나 말 등 가축은 물론 사람을 납치했다. 뿐만 아니라 부녀자와 여자아이를 살해했다. 왜구가 극심했던 1382년에, “서너 살짜리 여자아이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쌀을 넣고 고사를 지낸 뒤 그 쌀로 밥을 해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 밖에도 사찰의 종이나 벽화, 불화 등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1392년, 한반도와 일본, 두 지역에서 모두 새로운 정권이 탄생했다. 조일 양국은 신흥제국 명과의 관계수립을 위해 분주하게 책봉을 청하는 사절을 파견했고, 그 결과 명∙조선∙일본 사이에는 새로운 국제질서인 책봉체제가 수립되었다. 소위 사대교린의 외교시스템이었고, 신숙주는 이 시스템의 완성자였으며, 《해동제국기》는 일본에 대한 교린시스템의 완결편이었다.
대 일본외교의 달인 신숙주
신숙주(1417~1475)는 1439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자로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했으며, 1443년에는 통신사 서장관으로 일본에 파견되었고, 1452년에는 사은사로 명나라에도 다녀왔다. 이후 예조판서,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리고 1471년에는 평생의 외교적 경험을 망라하여《해동제국기》를 편찬했다.
1471년 봄, 예조판서였던 신숙주는“해동제국의 조빙(朝聘)∙왕래(往來)∙관곡(館穀)∙예접(禮接) 등에 대한 구례를 찬술하라”는 국왕의 명을 받았다. 일본과 오키나와로부터의 조빙∙교류∙교제로 사신파견이나 외교 관계를 의미하며, 외교 사절에 대한 숙소와 식량, 그리고 예로 대접하는 예우를 말한다. 이에 신숙주는 조선과 일본의 옛 전적을 참고하고, 또 일본에 통신사 서장관으로 다녀온 체험을 바탕으로《해동제국기》를 완성했다.
조선왕조의 대일정책에서 기본목표는 왜구금압과 통교체제의 구축이었다. 왜구금압을 위해서 건국 직후부터 막부장군을 교섭상대로 했지만 별 효과가 없자, 왜구에게 영향력이 있는 유력한 제후나 왜구세력들과 직접 교섭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구주탐제(九州探題)와 대마도주 등에게 왜구금압을 의뢰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여러 종류의 특권을 부여하여 통교체제를 완성해 갔다. 삼포제도, 서계, 도서, 문인, 금어조약, 세견선제도 등을 통해 왜구를 통교자로 전환시켜 갔으며, 1443년 신숙주에 의해 ‘계해약조’(癸亥約條)가 체결되면서 왜구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신숙주는 왜구문제를 총체적으로 해결했던 외교의 달인이었으며, 특히 삼포를 통하여 일본과의 공존∙공생을 모색해 갔다.
삼포, 공존∙공생의 메시지
《해동제국기》에 의하면, 1470년대,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입항한 선박수가 1년에 220여 척이나 되고, 입국 일본인 수도 6천 명에 이르렀다. 모든 내조자는 원칙적으로 사절의 형식을 갖추어 삼포로 입항했는데, 이들에 대한 접대규정을 29개 항목으로 세분하여 기술했다. 예를 들면, ‘제사정례’의 장에서는 이들을 4종류로 구분하였는데, 이들은 삼포로 입항한 후, 각기 정해진 인원만이 서울로 상경하여 국왕을 알현하고, 나머지는 삼포에 체류하면서 무역을 행했다.
삼포(염포∙부산포∙제포)에는 한시적으로 거주하는 항거왜인이 있었고, 외교와 무역을 위해 왕래하는 사송왜인, 흥리왜인이 있었다. 항거왜인들은 흙으로 벽을 쌓고, 이엉을 올린 흙집에 살면서 농업이나 어업에 종사했고, 상행위나 접객행위를 했으며, 부산포의 왜인들은 온천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왜인이 가장 많이 거주했던 제포에는 많을 때는 2,500명이나 살았고, 산기슭에는 11개의 절이 있었다. 일상적인 종교생활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선에서 일본으로 간 물품 중, 가장 많은 것은 목면이었고, 그 외에 비단, 인삼, 호랑이와 표범 가죽 등과 불경 등이다. 이 시기에 50질 이상의 대장경이 왜인들에게 하사되었고, 이 중 상당수는 지금도 일본의 사찰에 보관되어 있다. 반면 일본에서 조선으로 제일 많이 가져온 물품은 구리였다. 조선에서는 놋쇠그릇이나 동전, 금속활자 등을 주조하기 위해 구리 수요가 많았다. 또한 염료로 쓰기 위해 소목, 활의 재료로 물소뿔인 수우각, 화약원료인 유황, 그리고 육류의 각종 탕에 쳐서 먹는 후춧가루 등이 일본을 거쳐 들어왔다. 과거 왜구에 의해 약탈되던 물품들이 정해진 규정에 따라 교역이 이루어졌다.
《해동제국기》를 통해 완성한 신숙주의 교린정책은 삼포를 통해 입국한 자들을 상경시켜 국왕을 알현하는 외교적인 절차를 밟게 함으로써, 외교적으로 조선에 복속을 시키고, 그 대가로 무역을 허가해 주면서, 삼포를 무역의 장소로 활용했던 것이다. 1407년 포소의 개항으로부터 1510년 삼포왜란으로 마감되는 삼포시대 100년 간은 삼포가 한일 간의 ‘공존∙공생의 장(場)’으로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이점에서 우리는 신숙주의《해동제국기》를 ‘공존∙공생을 위한 역사의 메시지’로 다시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해동제국기
조빙응접기
해동제국기의 삼포도
- 맨 왼쪽부터 울산염포지도, 동래부산포지도, 웅천제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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