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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중국 초대 국가 주석 문화대혁명을 추진한 마오쩌둥(모택동)

마오쩌둥

한자 : 毛澤東, 이명 : 潤之,

 
  • 저필자임상범(성신여대 교수)
  • 생몰년생년 : 1893년 12월 26일 ~ 몰년 : 1976년 9월 9일
  • 발행일2012년 8월 25일
  • 분류정치가, 군인, 주석
 

“사회는 혁명을 요구한다!” 마오쩌둥(毛澤東)

 

지난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은 수교 20주년을 맞이하였다. 이에 중국현대사 이해를 돕기위해 신중국 창건의 주역 마오쩌둥(모택동)을 살펴볼 기회를 마련하였다 -편집자주
“어린아이가 뜻을 세우고자 고향을 떠납니다. 배움이 부족하여 이름을 내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뼈는 어느 뽕나무 밭이나 가래나무 밑에 묻을 겁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라져 가지만, 젊은이는 달랐다. 큰 키에 체중까지 불어서 위압적인 모습이 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몸에는 호랑이 기운과 원숭이 기운이 흐른다.” 호랑이는 왕자와 패도의 기세이며, 원숭이는 투쟁과 반란을 상징한다. 그는 일생동안 끊임없이 투쟁과 반란을 주도해서 전통 중국의 질서를 파괴했고, 신중국의 창립자가 되었다. 그는 바로 마오쩌둥(毛澤東)이다.

 

 『수호전』에 심취한 소년, 현대 중국의 진로를 좌우하다.

 

마오쩌둥은 1893년 12월 26일 부유한 농부의 맏이로 태어났다. 어려서 고전을 배우고, 민중반란을 그린 『수호전』에 심취했다. 개혁을 주장한 캉유웨이(康有爲)와 량치차오(梁啓超)에 빠져들었고, 중국공산당을 창립한 천두슈(陳獨秀)와 리다자오(李大釗)의 영향을 받고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국민당과 내전을 벌인 끝에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해서 주석에 취임했다. 그리고 1976년 9월 9일 자정 루게릭병으로 82년의 생을 마치기까지, 그는 국가와 당의 최고 통치자로 현대 중국의 진로를 좌우했다.
공산주의자가 된 뒤, 마오는 농민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1927년 8월 국공합작이 결렬되자 폭동을 일으킨 뒤, 징강산(井岡山)에서 주더(朱德)와 함께 홍군을 창설했다. 1931년에는 장시성(江西省)에서 중앙 소비에트를 조직하고 정부 주석이 되었지만, 소련의 지지를 받은 왕밍(王明)에게 우경주의자로 비판받고 실각했다. 마오는 어떻게 인민의 지지를 확보하고, 투쟁으로 동원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중국에서 농민과 농촌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중국의 실정을 알지 못하게 된다. 가난한 농민이 없었다면 중국 혁명도 있을 수 없었다. 한시라도 농민을 잊어서는 안 된다.”
중국 공산당은 1934년 12,500㎞의 대장정을 떠났다. 마오는 뛰어난 전투 능력으로 동료들의 지지를 받고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복귀했고, 1943년 3월 20일 중공중앙정치국회의는 마오쩌둥에게 정책의 최종 결정권을 부여했다. 당시 그는 ‘마르크시즘의 중국화’를 추구하면서 『실천론』과 『모순론』을 발표하고, 항전의 장기전을 예고한 『지구전론』, ‘통일전선론’의 근거를 마련한 『신민주주의론』, 소련이나 미국이 아닌 제3의 길을 추구하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것임을 구상한 『연합정부론』을 제시했다.

 

 문화대혁명을 추진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마오는 토지개혁과 경제개조로 중국을 사회주의로 개조하고자 시도했다. 처음에 그는 15년이 걸릴 것으로 생각했지만, 제1차 5개년 계획의 성취와 국외 정세의 변화로 인해 모든 계획이 급변했다. 1956년 소련에서 스탈린을 비판하자, 마오는 자신을 공산주의의 새로운 대표로 간주했다. 그는 다음해에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을 통해 체제의 공고화를 시도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대약진 운동을 추진했다. 이 실험이 최소 2000만으로 추산되는 아사자를 낳고 실패하자, 류사오치(劉少奇)가 사태 수습에 나섰다. 자신의 모든 성취가 위협받는다고 생각한 마오는 류가 혁명과 공산주의를 배반했다고 주장하며, 주자파를 타도하기 위한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으로 통칭)을 추진했다.
1966년 5월 16일 『나의 대자보-사령부를 포격하자』로 시작된 문혁은 정치·사회·문화적 변혁을 추구하는 권력 투쟁으로 발전했다. ‘주석의 최신 지시’가 발표되면 신속하게 전국에 전파되었고, 사람들은 군중집회를 개최해 환호했다. 마오의 사상은 인도의 Naxalite 운동, 유럽의 68운동 등으로 영향력을 넓혀 나갔다.

 

 구습과 일상적인 틀을 거부했지만, 우상 숭배의 도구로 남다.

 

문혁을 통해 권력을 다시 확보한 마오는 문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세력인 사인방과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덩샤오핑(鄧小平)을 중심으로 한 당 간부파를 등용했다. 그는 자신의 안배에 의해 혁명은 계속될 것이고, 국가 건설도 지속되리라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건설을 담당해야 할 화궈펑(華國鋒)은 덩샤오핑으로 대체되었고, 혁명을 대표한 사인방은 감옥으로 갔다. 그는 자신의 육체도 맘대로 할 수 없었다. 1956년 스스로 화장을 서약했지만, 중공 중앙정치국은 그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우상 숭배를 위한 도구로 영구히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성인군자도 승려도 아니고, 결코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아.” 그는 구습(舊習)과 일상적인 틀을 거부했는데, 심리적 불안으로 인한 신경쇠약에 시달렸으며, 줄곧 수면제에 의지했다. 그는 운동과 투쟁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했고, 육체노동과 활동을 빼놓을 수 없는 생존의 욕구로 간주했다. 그에게 평온무사하고 조용한 삶은 지루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고통에 처해 보지 않고서는 진정한 중국을 곧 잊어버리리라고 확신한 그는,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육체노동과 고통을 경험해보도록 강요했다.

 

 ‘재신(財神)’과 ‘혁명’이라는 마오의 상징들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개혁개방 이후, 마오는 황금을 갖다 주는 재물의 신으로 변신했다. 그런데 올해 초 중국의 인터넷을, 곧 이어 전 세계를 달군 중국의 이슈는 영국인 사업가 살인사건과 관련된 충칭시 당서기 ‘보시라이(薄熙來) 사건’이었다. 보시라이가 위기에 직면한 3월 30일, 마오쩌둥 좌파로 간주될 어떤 인터넷 논객이 『문혁은 재현될 수 없지만, 사회는 혁명을 요구한다!』라는 자극적인 글을 올렸다.
“덩샤오핑의 사후 당내에 들어온 신구 우파들은 암암리에 전반 서구화의 사상을 실시하면서 중국 사회주의를 차근차근 자본주의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있다. 양극분화는 세계 최고에 이르렀고 부르주아계급은 권토중래했다. 현재 어떤 사람은 문혁이 재연되기를 기대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두려워하고 있다. 문혁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인민들의 반억압, 반착취, 반부패, 반매국, 반관료주의의 호소를 ‘문혁사조’라고 배척하고, 인민들이 자본주의로의 개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 ‘문혁의 잔당’이라고 비난한다. 혁명은 마르크스주의의 전매품이 아니다. 억압과 착취가 있는 곳에 반항과 투쟁이 있다. 10억의 농민들이 각성해서 단결하면 어떤 세력도 저항할 수 없다. 당과 지도자가 개혁을 반성하고 사회주의의 공동부유의 길로 나아가지 않으면 새로운 정치경제의 대혁명이 일어날 때가 멀지 않았다.”
마오가 일부 분노한 사람들과 야심가들에게 다시 혁명의 화신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상반된 측면에서 많은 중국인들의 불안정한 삶을 지켜줄 수호신으로 자리잡아간다. 앞으로 현재의 중국인들이 재신과 혁명이라는 마오의 상징들 가운데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는 동아시아의 앞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북경 천안문에 있는 마오쩌둥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