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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청나라 전성기를 이끈 건륭제(乾隆帝)의 정복사업

건륭제

한자 : 乾隆帝, 이명 : 弘曆, 시호 : 高宗

 
  • 저필자이준갑(인하대 교수)
  • 생몰년생년 : 1711년 8월 13일(음) ~ 몰년 : 1799년 1월 3일(음)
  • 발행일2012년 11월 25일
  • 분류
 

청(淸) 건륭제(乾隆帝)와 정복 사업

 

국내외의 청사(淸史) 학계에서 주목을 끄는 흥미로운 주제 중 하나는 청대사를 이해하는 관점을 둘러싼 논쟁이다. 만주족이 한화(漢化)를 통해 중국을 성공적으로 지배했다는 주장과 청조는 입관(入關) 이후 줄곧 만주어와 만주문자, 만주풍속 등 만주전통을 고수하면서 중국 지배에 임했다는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청(淸)의 대외정복사업

 

청대의 만주전통으로 꼽을 수 있는 것 중에 무력행사를 통한 활발한 대외 정복 사업이 있다. 입관 이전부터 지속된 대외 정복 사업은 입관 이후에도 지속되어 강희제(康熙帝)를 거쳐 건륭제의 치세에 정점에 달했다. 대외 정복 사업의 연원과 속성을 따져보면 이는 분명히 만주전통을 계승한 것이지 한화의 결과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명대는 특히 중·후기에 북방의 몽골과 동남연해의 왜구에 시달렸고 말기에는 만주족의 침입을 막느라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선을 중국 내지(內地)로 돌려보면 명조의 전혀 다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명조는 내지에서는 시종일관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쳐 소수민족을 제압하고 동화시켰으며, 심지어 송두리째 멸절시켜 버리기도 했다. 쓰촨(四川), 후광(湖廣), 윈난(雲南), 구이저우(貴州), 광시(廣西) 등지의 소수민족에 대한 태도가 그러했다. 명조는 서남방 토사(土司)들의 저항에 대해 무력으로 응징하고 끈질기게 개토귀류(改土歸流)를 추진하면서 이들을 길들였다. 그 결과로 청대에 개토귀류를 마무리할 수 있었고 소수민족이 내지에서 청조의 안위를 위협하는 반란을 일으킨 빈도가 명대에 비해 현저히 감소했다. 명대의 내지(중의 변두리에 대한) 정복 사업이 결실을 맺었으므로 청대에 들어와 강희제나 건륭제의 정복 사업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명대의 황제는 명초(明初)를 제외하면 힘이 모자라 대외 정복에 나선 사례가 없었지만, 내지 정복에는 열심이었다는 점에서 청대의 황제들과 정복의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륭제의 무공(武功)과 청의 역량강화

 

건륭제는 ‘십전노인(十全老人)’으로 자처하면서 1740년대에서 1790년대까지의 대내외 정복 사업에서 거둔 무공(武功)을 자부했다. 열 차례의 전쟁 가운데에는 대외 정복 전쟁뿐만 아니라, 내부의 반란을 진압한 것도 있고 또 승리한 전쟁으로 받아들이기에 석연치 않은 것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열 차례의 전쟁을 통해서 건륭제가 청조의 영역을 지키고 확장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전쟁 가운데 건륭제가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것은 건륭 20년(1755) 2월에서 6월에 걸쳐 ‘병사 한 사람 상하지 않고 화살 한 대 부러지지 않고’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제1차 준가르 전쟁이었다. 필자는 이 전쟁에 대한 졸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글을 쓰느라 실록이나 《평정준가르방략》과 같은 관련 자료들을 읽어가면서 느낀 소감은 다음의 두 가지였다.
하나는 건륭제와 그를 보좌하는 군기대신들이 이끌어가는 청조가 대규모의 인적 물적 자원을 치밀하게 조직하여 머나먼 전장에 효율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거대한 제국이라는 깨달음이었다. 청조의 이런 능력은 최근에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대량의 무기와 군대를 이동시킬 수 있는 항공모함을 진수시킨 현대 중국에서 재현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만일 준가르의 지도자들이 청조의 엄청난 전쟁 수행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더라면 과연 그들과 정면으로 맞설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었다. 물론 준가르 측의 사료를 전혀 접하지 못한 채 청조가 작성한 문건에만 의존한 한계는 있었지만, 청조의 전반적인 전쟁 수행 능력은 100년 전에 중국 내지를 정복하면서 힘겨워하던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신장되어 있었다. 그 사이 청조는 정치나 사회, 경제 등 각 방면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1750년(건륭 15년) 무렵 청조는 전 세계 제조업 생산량의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고 평가될 정도의 초강대국이었다.
이러한 역량들을 동원하여 건륭제는 북로군 3만과 서로군 2만을 파견하였는데 여기에는 북경에 주둔하던 금려팔기(禁旅八旗)와 지방의 주방팔기(駐防八旗), 몽골병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1만 이상의 한인녹기병(漢人綠旗兵)도 동원되었지만 양로군(兩路軍)의 지휘부는 만주인과 몽골인으로 채워졌고 한인들은 철저히 배제됐다. 건륭제는 군사기밀이 누설될까 염려된다면서 만문(滿文)으로만 전황을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장수들은 ‘이몽제몽(以蒙制蒙)’, ‘이만제몽(以滿制蒙)’의 방식으로 서로 견제하게 만들었다. 병사들의 짐을 옮기기 위해 10만 마리의 낙타가 징발되었고 전마 15만 마리, 식용 소와 양 10만 마리는 주로 몽골 초원에서 사들였다. 1,750톤에 달하는 마른 국수와 떡도 군량에 포함되었다. 이 모든 병력과 물자는 짧게는 수백 킬로미터, 멀리는 천여 킬로미터 이상을 이동하여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처럼 치밀하게 준비한 정복 전쟁은 현실에서는 무척 싱겁게 끝났다. 지배자 다와치의 학정으로 말미암아 내분에 빠진 준가르의 지배층과 백성들이 대부분 청조에 투항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준가르 원정을 계기로 청의 영향력은 극대화

 

승리한 건륭제는 『평정준가르방략』을 편찬하게 하고 다와치가 최후로 저항하던 일리 격등산(格登山)에 만주어, 한어, 몽골어, 티베트어로 비문을 새긴 준가르 평정 기념비를 세웠다. 국자감을 비롯한 전국의 학교에는 만주어와 한어로 쓴 ‘어제평정준가르고성태학비(御製平定準噶爾告成太學碑)’를 세우게 했다. 이리하여 건륭제는 몽골인, 티베트인, 만주인, 한인 등 청조가 지배하던 여러 민족, 특히 절대 다수를 차지한 한인에게 자신이 준가르를 청 제국에 편입시켰음을 선포하고 과시했다. 또한 태묘(太廟)에는 준가르 평정을 고하는 제사를 직접 지냈고 천단과 지단(地壇), 사직과 취푸(曲阜)의 공묘(孔廟)에는 관원을 파견하여 제사를 올리게 했다.
준가르를 완벽하게 제압했다고 판단한 이 무렵은 건륭제의 일생에서 무척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거국적인 축하 분위기는 투항했던 준가르의 지도자 아무르사나의 반란으로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막을 내렸다. 준가르 4부(部)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기 원했던 아무르사나는 건륭제가 분할통치 방침을 고수하자 반청 행보에 나섰다. 이에 건륭제는 제2차 준가르 원정(1755~1758)을 단행하여 청조를 위협하던 준가르의 유목국가를 초원에서 아예 소멸시켜 버렸다. 그 후 청조는 이 일대를 새로운 영토(新疆)라고 이름 붙이고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 건륭제는 유목사회와 농경사회를 통합한 청조는 물론 그 주변의 나라와 민족들에게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배자라는 의미로 ‘중외공주(中外共主)’라거나 ‘천하대군(天下大君)’이라 자칭했다. 건륭제가 행했던 정복 사업의 귀추를 주목해보면 이런 호칭이 허장성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편집자 주 : 청 건륭제는 원나라 이후 중국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개척하였으며, 이때 확장한 청나라의 국경이 현재 중국의 국경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는 인물이다.

건륭대열도
- 청의 궁중 화가 : 스틸리오네 작(1758년)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격등산 비정과 일리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