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
한자 : 金春秋, 시호 : 太宗武烈王
- 저필자이종욱(서강대 총장)
- 생몰년생년 : 603년 (음) ~ 몰년 : 661년 (음)
- 발행일2012년 1월 25일
- 분류왕
김춘추를 다시 보다
김춘추(603~661, 재위 654~661)의 활동으로 동아시아 5개국 중 백제와 고구려가 사라지는 변동이 일어났다. 김춘추는 동아시아의 판도를 바꾼 것은 물론이고, 백제나 고구려가 아닌 신라·신라인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한국인을 만든 역사적 인물이기도 하다.
김춘추는 642년 고구려에 청병하러간 일로 동아시아를 상대로 첫 활동을 벌였다. 그 해 7월 의자왕이 거느린 백제군이 신라의 서쪽 40여 성을 함락했다. 8월 백제군이 합천의 대야성을 함락하며 성주 품석과 그의 아내 춘추의 딸 고타소를 죽여 머리를 백제 서울로 보낸 일이 벌어졌다. 춘추는 백제를 삼키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선덕여왕의 허가를 받아 또 다른 적국인 고구려에 청병을 하러 갔다 왔다. 춘추는 대사(大私) 즉, 자신의 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공(公) 즉, 백제정복으로 전환한 인물이라 하겠다.
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삼국통합의 꿈으로 전환하다
그 후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당나라에 대한 청병을 했다. 춘추를 왕으로 삼으려던 칠성우들이 주도하여 647년에 진덕여왕을 즉위케 하고 왕정을 장악했다. 648년에 춘추는 바다건너 당에 가서 당 태종을 만났다. 춘추와 당 태종의 만남은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변동을 초래하는 폭풍 같은 정치행위였다. 당 태종 앞에서 주눅이 들던 다른 나라 사신들과 달리, 춘추는 당 태종을 만나 영특하고 훌륭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국학에 가서 공자를 제사지내는 석전(釋奠)과 경전 강론을 참관하기를 청했다. 당 태종은 이를 허락하고 새로 편찬한 『진서』등을 선물로 주며 “무슨 생각이 있는가?” 물었다. 춘추는 백제의 침공으로 신라 인민 모두가 포로가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신라는 당나라에 직공(職貢)을 바칠 수 없게 될 것이라 말했다. 이에 당 태종은 군사를 내어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를 평정하고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을 신라에 주어 영원히 평안하게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춘추가 신라인의 장복(章服)을 고쳐 중국의 제도를 따를 것을 청하자 당 태종은 내전에서 진기한 옷을 내어 주었다. 당 태종은 춘추를 특진으로 삼고, 돌아오는 길에 3품 이상의 신료들로 송별연을 열게 하여 극진히 대우했다. 춘추는 셋째 아들 문왕을 숙위토록 남기고 돌아왔다.
춘추는 문화를 통하여 당 태종을 감동시켰고, 실제로 중국화를 시행해 나갔다. 649년 정월에는 처음으로 신라인들로 하여금 중국조정의 의관을 입도록 했다. 664년에 여자들도 중국의복을 입도록 했다. 650년에는 당나라의 영휘(永徽) 연호를 채택하였다. 이 무렵 신라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질서 속으로 더 다가간 것이다. 춘추는 국제화된 세계도시 장안성에서 소국 신라가 걸어가야 할 길을 생각했을 것이다.
춘추는 654년 왕위에 올랐다. 603년 진평왕의 뒤를 이을 왕위계승권자로 정해졌던 용수의 아들 춘추는 612년 출궁당하며 왕위계승에서 멀어졌지만, 그 후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칠성우의 노력으로 왕위계승을 위한 52년 프로젝트를 성공한 것이다. 당시 춘추를 왕위에 오르도록 한 칠성우들은 삼국통합을 이루어 평화와 번영을 이루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이 같은 목표는 춘추를 왕으로 삼으며 국가의 목표로 승격되었다.
왕위에 오른 춘추는 백제와 고구려 정복을 기획하게 되었다. 당시 신라는 혼자의 힘으로 백제나 고구려 어떤 나라도 정복할 수 없었다. 춘추는 당나라에 백제 정복을 위한 청병을 했다. 660년 3월 당 고종이 13만 명의 수륙군을 보내 백제를 정벌케 했다. 신라는 5만 병력으로 응했다. 7월 18일 의자왕의 항복을 받았다. 춘추는 고타소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했고,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것이다. 백제를 멸망시킨 전쟁의 주역은 당나라였다. 의자왕을 포로로 삼아 당나라로 데려간 것이 그 증거라 하겠다.
661년 춘추는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왕의 시호는 무열이라 했고, 묘호를 ‘태종(太宗)’이라 했다. 당 고종은 무열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낙성문에서 애도를 표했다고 한다. 그의 묘호 태종은 후일 당나라 태종의 묘호와 같은 것이기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으나, 이를 통해 신라가 묘제에서도 중국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춘추의 아들 문무왕은 668년 당나라 군대와 함께 고구려를 정복하여 선왕의 유업을 이루었다. 춘추가 백제를 정복하지 않았다면 문무왕이 고구려를 정복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무왕은 또 다른 9년 전쟁을 거쳐 대체로 청천강 이남 옛 백제와 고구려 땅에 머물던 당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춘추의 손자 신문왕은 새로이 늘어난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과 인민을 지배하기 위한 통치체제를 정비했다. 춘추는 후손들을 잘 만났다고 하겠다.
오늘날 한국의 주류 역사를 만들어낸 주역, 김춘추
춘추가 주도하여 시작한 삼한통합(소위 삼국통일)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동아시아의 판도를 바꾼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춘추가 주도한 삼한통합의 또 다른 결과를 볼 필요가 있다. 1985년과 2000년에 이루어진 인구 조사결과를 보면 신라의 왕을 배출했던 박·석·김의 성과 신라 건국신화에 나오는 사람을 시조로 하는 이·정·최·손·설·배씨와 같은 성을 가진 한국인이 다수인 것을 볼 수 있다. 신라인들은 정복자의 권리를 행사하여 옛 백제와 고구려인들을 사회적·정치적으로 도태시켰기에 백제나 고구려인을 시조로 하는 성은 찾기 어렵다. 이후 한국사의 주인공들은 신라계로 이어진 것이다. 만일 백제나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현재 한국인은 백제나 고구려인의 후손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단군을 시조로 한다는 순수혈통의 단일민족은 대한민국의 역사가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특히 춘추가 외세(당나라)를 끌어 들여 동족의 나라(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하여 그를 을사오적과 같은 존재로 보는 역사관도 현대 한국의 역사가들이 잘못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신라는 물론이고 고려·조선의 역사가들은 춘추를 천하를 하나로 바로 잡은 왕이라거나 당나라의 위엄을 빌려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고 군현을 삼아 융성한 시대를 불러왔다고 하여 왔다. 실제로 삼한통합을 주도한 김춘추는 한국사의 수많은 갈림길을 하나로 묶어 현재 한국·한국인·한국사회·한국문화의 주류 역사를 만들어낸 주역이 아닐 수 없다.
태종무열왕릉비
태종무열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