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창
한자 : 吳世昌, 이명 : 仲銘, 호 : 葦滄, 韙傖, 閒菴,
- 저필자장세윤(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생몰년생년 : 1864년 7월 25일(음) ~ 몰년 : 1953년 4월 16일
- 발행일2012년 2월 25일
- 분류정치가, 독립운동가
3·1운동을 주도한 시대의 선각자 오세창
93주년 3·1절을 맞는다. 우리는 보통 ‘3·1운동’, 하면 유관순을 떠올리거나 민족대표 33인, 그렇지 않으면 독립선언서 등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또 ‘민족대표 33인’, 하면 우리는 한참동안 생각한 뒤에야 손병희(孫秉熙)나 한용운 등을 떠올리지 않을까 한다. 이번 기회에 우리에게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 오세창(吳世昌) 선생을 소개하고자 한다.
개화사상가 오경석의 아들로 태어나다
위창(葦滄) 오세창은 1864년 7월 15일(음력) 서울에서 저명한 역관이자 대표적 개화사상가인 부친 오경석(吳慶錫)과 모친 김해김씨 사이에서 1남 1녀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8세(1871년)부터 16세(1879년)까지 부친이 설치한 가숙(家塾)에서 집중적으로 중국어를 공부하여 마침내 16세 때 역과(중국어) 시험에 합격하였다. 1880년 사역원(司譯院)에서 관리생활을 시작한 그는 1895년 일본 동경외국어학교의 조선어 교사로 나갈 때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 기자와 통신국장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오늘날 오경석은 한국 개화사상의 비조(鼻祖)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오세창의 집안은 8대가 대대로 역관이었던 거의 최고의 중인 명문가라고 할 수 있다. 오세창이 쓴 기록『김옥균전』을 보면 오경석이 여러차례(사실은 13차례) 중국을 다녀오면서 개화사상을 굳히게 되고, 특히 당시 조선의 실정을 돌아보면서 ‘일대혁신’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누차 강조하였다는 사실을 회고하고 있다. 후일 그가 개화 쿠데타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가게 되는 과정도 이러한 집안 내력과 큰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경제적 풍요와 상당한 문학적 소양을 갖춘 역관(중인)들은 자신들의 예술활동과 관심 분야를 골동서화와 금석학 분야로 확장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그 배경에는 조선 후기 청(淸)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서화와 고증학에 대하여 빈번하게 교류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오경석은 실학자 박제가와 김정희, 역관 이상적(李尙迪)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오세창은 가학 및 그 유풍을 자연스럽게 접하는 분위기에 젖어들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부친 오경석은『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편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는 한학(漢學)은 물론이고 서예나 금석학, 전각 등 인문·예술분야에 일찍부터 뛰어난 소양을 갖출 수 있었다.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다
1902년 오세창은 유길준(兪吉濬)의 쿠데타에 연루된 혐의로 결국 일본에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에서 동학교주 손병희를 만난 오세창은 같은 교단의 권동진(權東鎭), 양한묵(梁漢默)과 함께 평생의 동지로서 손병희를 수장으로 하는 동학 교단의 ‘문명파’를 형성했다고 평가된다. 1906년 손병희가 천도교를 창건하자 오세창은 같은 천도교 계통의 신문 『만세보』의 사장, 대한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一進會) 비판에 앞장섰다.
이후 오세창은 1919년 3·1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3·1운동의 준비와 전국적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그는 1919년 1월 말에서 2월 말까지 독립운동의 기획, 선언에 참가할 민족대표로서 천도교측 인사 11명의 교섭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의 총책임을 맡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 천도교의 도사(道師) 직책을 맡고있던 그는 손병희, 권동진, 최린(崔麟) 등과 함께 천도교를 대표하여 민족대표로 참여하였다. 3·1운동이 한창이던 4월 10일 서울에서 조선국민대회와 ‘조선자주당연합회’ 명의로 선포된 ‘조선민국 임시정부’의 내각에서 지금의 장관급인 식산무경(殖産務卿)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독립선언 직후인 3월 1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으로 서대문형무소를 나올때까지 거의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오세창은 1919년 4월 9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의 심문과정에서 미국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을 제창하고 있지만, 한국인들의 독립청원만으로는 ‘조선’을 독립시켜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또 3·1운동과 같은 대규모 독립운동을 전개한다고 해도 당장 독립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은 물론, 한민족 전체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한국인들도 민족자결의 의사가 있음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가했다고 당당하게 술회하여 민족대표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
서화가로서 문화운동에 헌신하다
그는 3·1운동 이후 서화, 골동품 수집과 감상, 서예 및 전각(篆刻) 작품 창작, 한국의 전통문화 관련 자료집 발간 등 문예·학예활동에 종사하는 길을 통해 은둔하며 지조를 지켰다.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상당수 인사들이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일제에 협력하는 길을 택했지만, 그는 조용히 은둔하며 유유자적하였던 것이다. 출옥 후 평소에 무척 즐기던 술과 담배를 완전히 끊은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사람들에게 ‘언론의 자유가 없는 시대의 처세술이냐’는 말을 들을만큼 말을 아끼며 침묵을 유지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서화가로서도 크게 활약하는 등 문화운동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1918년 서화협회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22년부터 서화협회전을 통해 왕성한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당대 최고의 서예가라는 평을 듣던 그의 서체는 당시 각일간지와 잡지의 제호 및 휘호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처럼 가문의 전통을 바탕으로 당시 급격하게 소멸되어 가던 우리의 민족문화 유산을 수집·보존하고 깊이 연구한 그의 일련의 행적은 민족문화 수호운동의 일환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의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깊은 애정과 뛰어난 감식안은 당대 최고의 수집가로 유명한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뛰어난 안목과 소양에 감명을 받은 전형필은 그에게 각종 서화와 골동품 수집에 관한 감식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부친 오경석과 자신이 수집한 많은 문헌과 고서화를 바탕으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편술하였다. 이 책은 역대 서화가들의 인명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쳐 서화가, 문인 학자들의 날인된 인장(도장) 자료를 모아 『근역인수(槿域印藪)』를 편찬하였으며, 수집한 고서화들을 화첩으로 묶은 『근역서휘(槿域書彙)』, 『근역화휘(槿域畵彙)』등 한국 서화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와 저술을 남겼다. 『근역서휘』는 신라의 김생·최치원부터 김정희에 이르기까지 역대 명필 692명의 필적을 모은 대단한 자료집이었다. 한편 『근역화휘』는 오경석과 오세창이 수집한 역대 191명의 작품 251점을 7권으로 정리한 화첩이었다. 또 옛 명필들의 서찰을 모은 『근묵(槿墨)』과 옛 서화가들의 인장을 모은 『근역인휘(槿域印彙)』를 만들 정도로 서화와 인장을 수없이 접하여 매우 뛰어난 안목을 갖추고 있었다. 오세창은 또한 글씨에도 능했는데,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즐겨 썼다. 고서화의 감식과 전각에도 당대의 1인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또한 합천 해인사의 사명대사비 등 기념비의 글씨와 저명한 문화재 수집가 전형필이 우리나라에 세운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의 지석을 비롯한 각종 제호 등 많은 글씨를 남겼다. 오세창은 ‘당대의 감식안(鑑識眼)’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그가 진품이라고 하면 진품이고, 가품이라고 하면 가품이었던 것이다.
오세창은 1945년 8·15해방을 맞아 한국사회의 원로 지도자로 널리 추앙받았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한국민주당 영수,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회 위원으로 추대되었으며, 신한민족당 부총재·민주의원·서울신문 사장으로 여러 정치·사회활동에 참여하였다. 1949년 6월에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백범 김구의 장의위원장을 맡았다. 6·25전쟁 중 대구로 피난갔다가 1953년 4월 90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또 문화부는 1996년 ‘1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였으며, 2004년 3월에는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에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여 그의 문화적 업적과 독립운동을 널리 선양하였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 개화 혁신운동에 앞장선 것은 물론,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의 1인이며, 우리 민족문화에 대한 깊은 자부심과 뛰어난 인문적·예술적 소양을 갖춘 오세창! 그는 분명 현재의 시각으로 봐도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한국인, 나아가 한·중·일 3국의 정치·문화적 맥락과 깊이 연관된 동아시아인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오세창(1864~1953)
1946년 3·1절에 쓴 유묵 ‘광명정대’
3·1운동 직후 체포된 오세창 판결문
망우동에 위치한 오세창 기념비
오세창이 1946년 광복 1주년 기념식에서 일본에 빼앗겼던 옥새를 인수받고 식사를 낭독하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