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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구려의 인물 연개소문은 어떤 사람일까?

연개소문

한자 : 淵蓋蘇文, 이명 : 泉蓋蘇文,

 
  • 저필자김현숙(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생몰년 ~ 몰년 : 666년 (음)
  • 발행일2010년 2월 25일
  • 분류귀족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은 왜 ‘천남생’이 되었을까?

 

동아시아사에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수많은 역사 인물이 등장합니다. ‘동아시아역사인물’은 이런 사람들의 행적을 소개합니다. 이 중에는 동아시아의 평화와 교류 협력에 기여한 사람도 있고, 이에 역행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알려진 인물도 있고, 역사책에는 없지만 귀감이 될 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번 달과 다음 달에는 2회 연속 연개소문의 자손들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_ 편집자 주
요즘도 심심치 않게 사회지도층 인사 자녀들의 국적포기 문제가 논란이 되곤 한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국적을 어느 나라로 선택하느냐가 아니다. 국적 포기자들의 상당수가 대한민국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는 다른 국민들보다 더 많이 챙겨 누리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짊어지는 의무는 지려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다. 대다수의 힘없고 돈 없는 국민들이 그들의 행태에 열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적을 바꾼 사람들은 옛날에도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다 있었을 것이다. 아니 국적을 바꿨다기 보다는 자기가 살던 나라를 떠난 사람들이라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근대 이전에는 국적 바꾸고도 여전히 그 나라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을 테니까.
나라를 떠나야했던 이유도 여러 가지였다. 더 큰 꿈을 펼치기 위해 떠난 경우도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설 자리가 없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떠나야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고구려처럼 전쟁에서 패배하여 멸망한 나라의 경우에는 전쟁 통에 포로가 되거나, 나라가 망해서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끌려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고구려를 떠난 사람들도 있다. 그 가운데 천남생(泉男生)과 천헌성(泉獻誠)이 있다. 이들은 그 출처를 대면 금방 알만한 인물이다. 천남생의 아버지는 너무나 유명한 연개소문(淵蓋蘇文)이다. 천헌성은 연개소문의 손자이자 천남생의 아들이다. 연개소문의 아들과 손자가 난데없이 천씨가 된 것은 당(唐)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연(淵)자를 피했기 때문이다.《 신당서(新唐書)》의 천남생열전과 그들의 묘지명에 모두 ‘천남생’, ‘ 천헌성’이라 되어 있다. 당나라에 자신들의 운명을 맡긴 탓에 죽어서도 연이라는 본래의 성씨를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영광과 오욕의 연씨 집안 연대기

 

연씨 집안의 시조는 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연못 연(淵)자를 성씨로 한 것이다. 고대 시기에는 왕뿐 아니라 힘 있는 귀족 집안에서도 자기 집안의 신성함을 과시하기 위해 이런 식의 시조탄생설화를 가지고 있는 예가 많았다. 그렇더라도 물의 자손이라 자칭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는 없었다. 고구려 말기의 최고 권력층인 연개소문의 집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건국 시조인 주몽(朱蒙)은 태양신인 해모수와 물귀신 하백의 딸인 유화부인의 아들이었다. 따라서 물의 후손을 자처한다는 것은 연씨 집안의 권위가 대단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계에서는 연개소문이 고구려 후기에 새로 일어난 신흥귀족 집안 출신일 것으로 보고 있다. 남생의 묘지명에는 조상의 덕택으로 영화를 누렸다고만 되어있고, 천헌성의 묘지명에는 증조부인 대조(大祚)가 막리지로서 병권을 장악했고, 5부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기세가 삼한을 제압했다고 되어 있다.《삼국사기》‘연개소문전’에도 아버지가 동부(서부)대인이었다고 하는 구절이 나온다. 이로 보아 연개소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대에 권력의 핵심부로 진입하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 집안의 설화가 두만강 유역 일대에 알려져 있었다고 하므로, 아마도 이 지역의 유력 토착세력이 6~7세기대에 중앙정권으로 편입하는데 성공하면서 크게 성장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연개소문 정도의 위상이라면 없던 설화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집안은 연개소문 아들 대에 와서 ‘연(淵)’대신 ‘천(泉)’이란 성(姓)을 쓸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 집안의 영광도 ‘연못’에서 ‘샘’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통일왕조인 수(隋)의 대대적인 침략을 훌륭하게 막아냈고, 칼칼한 태종(太宗)이 직접 이끌고 온 당나라 군대까지 물리쳤던 고구려가 마침내 멸망하게 되는데, 남생 부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멸망 전 당으로 귀화한 아버지와 아들

 

할아버지인 연개소문이 권력의 최정점에 도달해 있던 650년(보장왕 9년)에 천헌성이 태어났다. 최고 권력자의 장손인 만큼 9세에 벌써 ‘선인(先人)’이란 관등을 받았다. 666년에 아버지인 남생이 막리지가 되고 지방순시를 나갔을 때 수행했던 것을 보면, 이때 벌써 관인으로서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헌성이 16세였던 666년에 그의 운명과 함께 고구려의 국운이 바뀌는 큰일이 일어났다. 아버지인 연개소문이 죽고 그 자리를 이어받은 남생이 지방순시를 위해 수도를 떠나있을 때,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이 형인 남생을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형제간의 권력쟁탈전에서 패해 수도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남생 일파는 이러저러한 논의들을 구구하게 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헌성이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이자 당시 부수도였던 국내성(지금 중국 지린성 지린시)으로 가자고 제의했다.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위상이 약화된 국내성의 귀족들은 아무래도 중앙귀족들에게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천도 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또 거대한 무덤과 우수한 벽화고분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권력과 부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양 세력에 대한 그들의 불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양원왕 13년(557년)에도 이곳 환도성의 간주리(干朱理)가 모반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헌성은 이 지역의 불만세력을 등에 업고 권력을 탈환하기 위해 이곳으로 가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연개소문
드라마 "대조영"과 "연개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