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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을 도운 일본인 후세 다쓰지, 일본인 최초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수여받다.

후세 다쓰지

한자 : 布施辰治,

 
  • 저필자허동현(경희대 교수)
  • 생몰년생년 : 1880년 11월 13일 ~ 몰년 : 1953년 9월 13일
  • 발행일2010년 7월 25일
  • 분류변호사, 사회운동가
 

양심에 따라 조선 독립을 도운 후세 다쓰지

 

일본인이길 부끄러워한 일본의 양심. 암울한 일제 치하 피압박 식민지 사람들의 손을 잡아 준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80~1953). “박애의 이상 아래 약육강식의 현실을 없애고 이를 실행할 철학을 갖기 위해서는 학식과 장기간의 공부가 필요하다. 법률은 도덕과 더불어 사회생활의 원리이기 때문에 이를 배우는 것은 자신의 철학 연구의 일부이다《( 어떤 변호사의 생애 1963).” 약자 편에 서기 위해 법학을 배운 그는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1911년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는 글을 발표할 만큼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그는 1919년 2∙8독립선언을 이끈 최팔용과 백관수의 법정투쟁을 도운 것을 계기로 일본 내 노동운동, 농민운동, 수평운동은 물론 “조선인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사건”에도 직접 나설 것을 천명했다.
“인간은 누구든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 나가는 것이 좋은 가에 대해 진정한 자신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는 양심의 소리이다. 나는 그 소리에 따라 엄숙히 ‘자기혁명’을 선언한다. 사회운동의 급격한 조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종래의 나는 ‘법정의 전사라고 말할 수 있는 변호사였다. 하지만 앞으로 ‘사회운동에 투졸(鬪卒)한 변호사로 살아나갈 것을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민중의 권위를 위해 선언한다. 나는주요 활동장소를 법정에서 사회로 옮기겠다(‘자기혁명의 고백’,《 법정으로부터 사회로》창간호, 1920).”

 

 약자 편에 서기 위해 법학을 배우다

 

그때 그는 자기 혁명의 구체적 실천을 위해 민∙형사를 불문하고 다음과 같은 사건에만 변호활동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1. 관헌에게 실상과 다른 죄나, 부당한 부담을 강요받은 사건 2. 자본가와 부호의 횡포에 시달리는 사람의 사건 3. 관헌이 진리의 주장에 간섭하는 언론범의 사건 4.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과 투쟁하는 무산계급의 사건 5. 인간차별에 맞서 투쟁하는 사건 6. 조선인과 대만인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사건”
이처럼 차별받는 민중을 위한 변호사를 자임한 그에게 민족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조선 독립에 대한 그의 인식은 다음 인용문에 잘 나타난다. “한일합방은 어떠한 미사여구로 치장하여도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침략이었다. 침략을 당한 조선 민중이 더욱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유독 조선민중의 착취와 압박이 눈에 띠는 것은 무대가 무대인 점과, 미명아래 병합된 병합이 실은 너무나도 선명하고 참혹한 잔학상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민중의 해방운동이 통절하게 우리 일반 무산계급의 마음을 울리고, 조선민중이 철저한 무산계급 해방운동을 전개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조선민중의 해방운동에 특단의 주의와 노력을 바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적기》, 1923).”
그가 1926년 3월 이 땅에 왔을 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보낸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에 대한 ‘사죄문’은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설령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 활동근거를 두고 있어도 일본 민족이라는 민족적 틀에 빠져들지 않으며, 또 실제 운동에도 민족적 틀에 빠져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진재(震災) 직후의 조선인 학살문제에 대한 솔직한 나의 소신과 소감을 모든 조선동포에게 말하려 합니다. 일본인으로서 조선동포들에게 조선인 학살문제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표명하고 자책을 통감합니다.”
그는 계급해방이 민족 문제의 해결의 지름길로 본 “일본 무산운동의 맹장”이었지만, 계급의식에 함몰된 편협한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이 점은 조선공산당 사건(1927)을 민족전체의 저항으로 여긴 그의 시각이 웅변한다. “공산당사건의 변호는 단순한 형사사건이나 재판사건의 변호가 아니다. 사건의 내용과 사실은 밝히지 않겠지만, 대강을 이야기하면 공산당사건의 진상은 총독정치의 폭압에 대한 일종의 반항투쟁이다. 이 사건은 총독정치의 폭압에 반항할 수밖에 없는 조선동포 전체의 사건이다. 현재 법정에 서 있는 100여명의 피고만의 사건이 아니다. 따라서 법정에 서 있는 피고들은 총독정치의 폭압에 반항하는 조선동포를 대표한 최전선의 투사가 적의 포로가 된 것이라고 여겨진다(《해방》7-1, 1928).”그렇기에 그는 자신과 정치적∙사상적 지향을 달리 하는 의열단원 김지섭의 ‘폭발물취체벌칙위반사건’(1924)이나 천황폭살을 꾀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의 ‘대역사건’(1926) 등의 변호도 맡았다.

 

 일본인 최초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수여받다

 

“일본 제국의회 등에서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명하고 있으나, 산업관계에 대해서는 통계숫자를 들면서 치적을 선전하고 있다. 식민지 산업에 대한 근본적인 의혹은 아무리 산업이 발달하고 농업시설이 개선되어도 그것이 식민지 동포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총독부의 정치는 경찰력을 동원한 일본 본위의 정치이기 때문에 식민지 산업의 수확은 본국으로 이송되고 있다. 나는 소위 식민지 정책이란 것에 대해 반대함과 동시에 식민지 동포와 함께 해방을 바라고 있다(“조선의 산업과 농민운동” 1926). 이처럼 그는 일제 식민지지배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우리 민족의 독립을 진정으로 바랐다. 그러나 그는 1932년 법정모독을 이유로 징계재판에 회부되어 변호사 자격을 빼앗겼으며, 이듬해에는 신문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금고 3개월의 실형을 언도받았다.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다시 변호사 활동을 재개한 그는 1946년 ‘조선건국헌법초안 사고’를 재일동포들과 함께 집필하는 등 조선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보였다.
“선생님은 우리 조선인에게 정말로 아버지, 맏형 같으며, 구원의 배와 같은 귀중한 존재였습니다.”1953년 향년(享年) 72세에 하늘로 돌아간 그의 영전에 재일 조선인 승려 유종묵이 바친 조사의 한 구절이 잘 말해주듯이, 한국인의 가슴에 ‘한국판 쉰들러’로 살아 숨 쉬는 인권 변호사 후세 다쓰지. 그는 독립 운동가들의 법정투쟁을 도운 공로로 2004년 일본인으로 최초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모래사장에서 찾은 바늘과 같기에 그에 대한 기억은, 더불어 살기를 꿈꾸는 한일 두 나라 시민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밝힐 희망의 등불로 더욱 빛난다.

후세 다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