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노 사쿠조
한자 : 吉野作造, 호 : 古川學人, 시호 : 古川學人
- 저필자김종식(아주대 교수)
- 생몰년생년 : 1878년 1월 29일 ~ 몰년 : 1933년 3월 18일
- 발행일2011년 2월 11일
- 분류정치가, 교육자
3∙1운동을 지지한 일본의 지식인 요시노 사쿠조
다시 3월 1일이 다가오고 있다. 3∙1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자주 독립의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동시에 세계에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와 역량을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3∙1운동은 우리에게 민족적 자긍심과 역사적 교훈을 주고 있지만, 92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새로운 문제의식과 생각을 던져주고 있다.
3∙1운동은 한국사와 세계사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3∙1운동은 국내적으로는 독립운동의 질적인 변화와 ‘무단통치’에서 기만적이지만 ‘문화정치’로의 변경을 가져왔고, 세계사적으로는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비폭력저항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한편 3∙1운동을 전후한 일본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의 패전 이전 가장 민주주의적 시기라고 일컬어지는 다이쇼데모크라시 시기였다. 다이쇼데모크라시는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승국이 되면서 서구의 민주주의적인 풍조가 급속히 확산된 것을 배경으로 하였다. 식민지 조선의 민족자결주의와 일본의 다이쇼데모크라시는 같은 배경 하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3∙1운동 시기 일본의 정세와 상황에 대한 이해는 3∙1운동의 세계사적 의미를 구체화하고, 한국사적 시야를 확장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다이쇼데모크라시의 개척자
한국사적인 관점에서 3∙1운동을 전후한 시기 일본은 조선총독부로 상징되어 단순하게 인식되었다. 3∙1운동을 전후한 식민지 조선에 친일파부터 방관자, 독립운동가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듯이, 당시 일본에도 3∙1운동에 대하여 강경한 제국주의자부터 무관심자, 온건한 제국주의자, 반제국주의자까지 다양한 군상이 존재하였다. 일본의 다양한 인간군상은 3∙1운동을 다양하고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총독부에 대립하는 입장에서 3∙1운동을 지지한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1867~1933)라는 당대 일본의 지식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요시노 사쿠조는 다이쇼시대 대표적인 정치학자이며, 다이쇼데모크라시의 개척자로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의회정치 주창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요시노는 1878년(명치 11) 1월 일본 미야기현(宮城縣) 후루카와(古川)에서 솜집을 하는 요시노 토시쿠라(吉野年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제2고등학교(센다이) 재학 중에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1904년 동경제국대학 법과대학 정치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1909년 법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1915년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3년간 구미에서 유학하였다.
요시노의 다이쇼데모크라시의 사상은 민본주의(民本主義)로 알려졌다. 민본주의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천황의 주권을 승인한 위에, 주권의 운용을 국민의 이해에 따라서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이 필요로 하는 바를 정부의 기본목표로 수행해야 한다는 주의이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보통선거권의 확립, 정당정치의 활성화, 군부와 관료중심의 번벌정치에 대한 비판, 정당내각의 성립을 주장하였다. 천황지배를 승인한 위에서 제한적이고 방법적인 국민참여의 민주정치를 구현하려고 하였다.
한일 상호이해의 또다른 출발점
요시노는 1905년 조선문제연구회의 조직에 참여를 시작으로 조선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유럽에서 귀국 후 YMCA를 통해 재일조선인 유학생과 교류하게 되었으며, 1916년 3월 말부터 3주간 조선과 만주를 방문하여 일본의 통치에 대한 조선인의 비판을 직접 듣게 되었다. 일본에 돌아온 후 그는 조선총독부의 무단정치 실태를 지적하고,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 조선인을 하나의 전통을 지닌 민족으로 승인하는 등 일본국민에게 조선의 실정을 알리고, 조선통치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요시노는 3∙1운동의 원인을 기독교와 선교사 등 제3자의 책동이라는 일본 주류언론의 논조를 비판하면서, 조선정책의 부당성과 운동과정에서 드러나는 조선인 학살을 폭로하고 일본 국민의 양심마비를 비판하였다. 그는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치 개혁의 요구사항으로 언론의 자유, 조선인 차별대우의 철폐, 무력통치정책의 폐지, 조선의 자치를 주장하였다.
요시노는 천황제 지배를 승인한 위에서 보통선거와 정당내각을 주장하듯이, 일본의 식민지 조선 지배를 승인한 위에서 일본 국내의 다이쇼데모크라시 정책을 식민지 조선에 적용하려고 하였다. 3∙1운동 이후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인식과 통치정책은 일본의 다이쇼데모크라시 분위기를 반영하였으며, ‘문화정치’는 3∙1운동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일본 국내 다이쇼데모크라시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당대 일본을 리드했던 요시노 사쿠조의 3∙1운동 이해는 식민지 조선에 대하여 하나의 관점이 아닌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였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며, 동시에 그 한계도 분명히 하였다.
이후 요시노는 1924년에는 일간지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 편집고문 겸 논설위원으로 일하기 위해 대학 교수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치평론이 문제가 되어 같은 해 퇴사하여 동경대의 강사로 돌아왔다. 명치문화연구회를 조직하여 폭넓은 멤버로《명치문화전집(明治文化全集)》을 간행하여 명치시대 사료의 보존과 출판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무산정당에도 관계하여, 우파 무산정당인 사회민중당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3년(소화 8), 늑막염이 발병하여 5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요시노 사쿠조는 3∙1운동을 바라보는 일본사회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존재이다. 한국사회가 일본사회의 다양성을 인식하는 것은 한일 상호 이해의 또 다른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요시노 사쿠조
낭인회(浪人會)와 신인회(新人會)가 공동주체한 시국강연회 참석자들과 함께 앞줄 맨 오른쪽이 요시노 사쿠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