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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동북공정 바로알기 - 백두산 정계비의 위치 백두산 정계비의 위치 알아볼까요▶ 백두산정계비는 원래 소백산에 있었다.▶ 백두산정계비는 세워질 때부터 1931년까지 백두산 기슭에 있었다. 중국에서는 를 소백산에서 백두산으로 옮겼다는 ‘정계비 이동설’을 주장하여 국경문제에 새로운 파문을 던지고 있다. ‘정계비 이동설’에 따르면 당시의 기록과 지형, 경계 표지 등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두만강이 시작하는 지류는 홍단수(紅丹水)고 백두산정계비의 원래 위치는 소백산 정상이다. 정계비 건립 직후 조선측 관리들이 정계비를 백두산 남쪽 기슭으로 옮기고 정계비와 토문강 사이에 목책·돌무더기·흙무더기 같은 경계 표지를 설치하여 경계를 조작하였다고 한다. 19세기 이래 국경회담에서 백두산정계비를 기준으로 경계를 정했음을 생각할 때, 이 논리대로라면 백두산에서 남쪽으로 2.. 더보기
동북공정 바로알기 - 발해의 멸망과 부흥운동 발해의 멸망과 부흥운동 발해의 멸망과 부흥운동 알아볼까요▶ 발해가 거란의 요에게 멸망당하였으니 발해사는 중국사다.▶ 옛 발해의 영토 여기저기에서 부흥운동이 이어졌으며, 발해 유민의 고려 이주가 200년간 지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발해 유민을 수용한 고려는 발해 계승의식을 보여주었다. 중국학자들은 발해가 요(遼)에 망한 뒤, 유민 대부분이 요의 백성으로 살아갔고 고려(高麗)로 들어간 이들은 소수였다는 점을 들어 발해사를 중국사라고 주장한다. 발해가 요에게 망하였고 거란의 요는 현재의 중화 민족으로 융화되었으니 발해사는 중국사라는 입장이다.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大諲譔)이 요에 항복하였지만, 발해인들은 부흥운동을 일으켜 요의 지배를 거부하였다. 발해 유민의 부흥운동은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 살펴보아도 후.. 더보기
동북공정 바로알기 - 발해문화의 독자성 발해문화의 독자성 알아볼까요▶ 발해와 당의 문화적 차이는 중앙과 지방의 차이에 불과하다.▶ 발해는 고구려 문화를 계승한 바탕 위에서 당의 문물을 수용하였다. 중국학자들은 발해의 문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말갈인의 문화가 발해 문화의 바탕을 이루며, 건국 후에는 당 문화의 강한 영향아래 발해 문화가 발전하였다. 발해가 당에 보낸 수많은 사절을 통하여 당 문화의 수입에 힘을 쏟았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또한 발해는 당의 지방정권이므로, 그 문화도 국가적 차이가 아니라 중앙과 지방의 차이에 불과하다. 발해의 문화에 말갈이나 당 문화에서 유래한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고구려 문화의 영향이다. 가령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上京城)이나 일본과의 교통로에 있던 현재의 연해주 .. 더보기